남편은 애들하고 식탁에 앉아서 나를 기다린다.
"여보, 당신도 앉으세요. 어머니 진지 잡수시라고 그래라."
그리고 내가 앉아야 수저를 든다. 아무리 바빠도 일단 앉아서 한술이라도 뜨고 일어난다. 이것저것 먹어보면서 또 말한다.
“당신은 정말 요술 손이세요. 어떻게 그 짧은 시간에 반찬을 이렇게 많이, 맛있게 하셨어요? 이 나물도 맛있고 이 자반도 맛있고 너무 맛있어요. 니들도 안 그러냐?”
“예, 그래요 아빠.”
퇴근해서는,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기가 바쁘게 이렇게 말한다.
“여보, 오늘 별일 없으셨어요? 저는요, 우리 집 현관문만 열면 천국 같아요.”
아이들도 그런 광경, 그런 말을 하도 보고 들어서 그런지 '닭살 돋는다' 든지 그러지 않고 으레 그러려니 한다.
그렇게 아침을 즐겁게 열어 주고, 집을 천국으로 알아주던 당신……. 남편은 오로지 내가 있기 때문에 자신이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내가 무슨 일 때문에 혼자 외출하면 집에서 굉장히 심심해 했다.
“엄마 없으면 니들은 다 필요 없어 야.”
애들이 심심해하는 아빠를 즐겁게 해주려고 하면 시큰둥했다. 하여간 모든 걸 나하고 함께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무슨 문제가 생기면 나는 물론 애들까지 다 불러 모아 상의를 하곤 했다.
“이번에 거기 가서 공장 지을 땅을 봤는데 어떨까? 어떻게 생각하냐?”
그렇게 애들한테까지 상의를 했다. 가족끼리 식당 같은 데 가서도 자기 먹고 싶은 것 말고 나 먹고 싶은 것부터 물어보고 애들에게도 물어본다. 그러면 애들은 저마다 의견이 각각이어서, 티격태격 시간이 흘러도 결정이 될 때까지 가만히 듣고만 있지 강요하지 않았다. 애들인데도 남자 여자 따지지 않고 진정으로 존중해 주는 빛이 눈에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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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편과의 즐거운 한 때 (2000년대 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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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운전을, 아니 자동차 자체에 대해서 잘 모르니 사고를 자주 저질렀다. 그런데도 남편은 단 한 번도 면박을 주거나 화를 낸 일이 없다.
어느 여름날, 부천 학원을 다녀오는데 차가 몹시 열을 받아서 뜨거웠다. 문득 제주도에서, 한 택시기사가 차의 보닛을 열더니 양동이로 물을 붓던 광경이 생각났다.
나도 집에 도착하여 세피아의 보닛을 올린 다음, 눈에 바로 띄는 엔진오일 뚜껑을 열고는 수도에서 물을 받아 가득 부었다. 그런데도 넘치지 않으니 모자란 줄 알고 또 한 통을 부었다. 엔진오일이 들어가야 할 곳에 물을 부었으니 어떻게 되었겠는가.
며칠 전 뉴프린스 신형이 출시되자마자 남편에게 선물로 받아서 한 번도 운행을 하지 않고 그냥 세워두었던 새 차인데, 나는 그 차에도 물을 부었다. 그때 마침 남편이 퇴근하고 돌아왔다.
“당신, 뭐하시는 거예요?”
“예, 차에 물 부었어요. 당신 차도 부어드릴까요?”
“아뇨, 됐어요.”
그런데 이튿날 학원에 가려고 하니 내 차가 시동이 안 걸리는 것이었다. 그 바람에 그 새 차의 엔진을 완천 교체하는 소동을 벌였다. 그때 남편의 차는 다이너스티였는데, 남편이 "됐어요" 했길래 망정이지 "그래요" 했더라면……
또 나는 운전도 잘 못해서 사고를 가끔 내는데, 그럴 때마다 남편은 아이들한테 이렇게 변호해 준다.
“그러면 엄마하고 이 차하고 안 맞는 거야, 그렇지? 그러니까 엄마 차 바꿔드려야겠지?”
그래서 1995년부터 세피아, 뉴프린스, 레간자, 그랜저로 2년마다 한 번씩 4대를 바꿔주었다. 그리고 또 다음에는 엄마에게 어떤 차를 사드릴까 하며, 미국에 있던 큰딸한테 전화까지 걸었다.
“엄마 다음에 차 뭐 사드리면 좋겠냐?”
“아빠는?”
“아빠는 외제를 못 타지만 엄마는 BMW를 사드리고 싶다. 엄마는 운전도 잘 못하시고, 우리 집에서 엄마한테 무슨 일 생기시면 큰일나잖니?”
“아빠 말씀대로 하세요.”
그렇게 해서 BMW로 결정이 났는데, 남편은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저세상으로 떠났다. 아이들은 그게 못내 아쉬웠든지 저희들끼리 의논을 한 모양이었다.
"아빠가 안 계시니까 저희라도 대신 약속을 지켜 드려야죠."
그래서 2004년 2월에 분에 넘치는 BMW를 사게 되었다. 그것은 이 세상을 떠나고 없지만 분명 남편이 사주는 차였다. 내가 원하는 것은 뭐든지 무조건 들어주던 당신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