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이 1988년도에 연세대 산업대학원 고위자과정을 다닐 때, 우리 부부는 나란히 등·하교를 하였고 같이 앉아서 수업을 들었다. 부부동반이 그곳의 규칙이기 때문이다.
1년 과정을 무사히 마치고, 89년에 소위 '졸업여행'을 제주도로 갔다. 그게 아마 우리 부부가 본격적으로 여행을 다니게 된 계기가 된 것 같다. 그때까지는 아이들 키우랴 봉사활동 하랴 항상 바쁘고 여유 없게만 살았는데 그때부터는 사회를 알고 여행에도 취미를 들인 것이다.
지금도 눈에 선하지만, 부부동반으로 1백 명쯤 되는 대규모 단체여행이었는데도 다양한 분들과 친해질 수 있어서 너무 좋았다. 그때 한라산 등반도 했는데 우리는 올라갈 때도 맨 꼴찌, 내려올 때도 꼴찌였던 기억을 떠올리면 웃음이 절로 난다. 그때까지 운동 같은 건 아예 생각도 못 하고 애들 키우느라 바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때부터 새벽에 일어나 둘이 손잡고 산에 다니며 운동을 하기 시작했다.
금성협의회에 가입한 다음부터는 산업시찰 명목으로 1년에 한 번은 반드시 해외여행을 갔다. 물론 사장님들만 갈 때도 있었지만 대개는 부부동반이었다. 그때 비로소 외국 문화를 처음 접하게 되었고, 세상을 넓게 보고 살아야겠다는 안목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애들까지 떼어놓고 어렵게 가는 여행인데 그냥 둘러만 보고 오는 1회성으로 끝낼 게 아니라, 남의 나라 문화도 받아들이고 우리나라의 개선할 점은 무엇인지 알기 위하여 밤마다 그날에 대한 감상과 함께 일지를 쓰곤 하였다.
“잡시다. 당신은 피곤하지도 않으세요?”
“저 이것 좀 쓰고요. 먼저 주무세요.”
“천천히 하세요, 기다릴 테니까.”
평생을 남편은 잘 때도 같이 자야하고 일어날 때도 함께 일어나야 했다. 집안 일이 밀려 있어서 늦더라도 내가 올 때까지 이것저것 사업구상을 하면서 기다리곤 했다. 기념일 같은 것도 반드시 둘이 함께해야 했고, 여행을 가서도 풍경이 좋거나 마음에 드는 분위기가 나타나면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었다.
“여보, 여기 서보세요! 와, 풍경 멋있는데요! 역시 당신이 서면 한 폭의 그림이에요.”
그래서 가지고 있는 사진들을 보면 나 혼자 찍은 것이 많다. 내가 남편을 찍어 준다든가 같이 찍자고 해도 막무가내로 나 혼자만 세운다. “뭘 같이 찍어요? 나는 당신 찍어 주는 게 더 좋아요.”
조금만 멋지다고 생각되면 또 앞서가고 있는 나를 불러댄다. “여보, 여보! 이리 오세요! 여기요!”
일행에게 눈치가 보여 내가 그렇게 눈을 흘겨대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내가 화장실에 갈 때도 마찬가지였다. 둘이만 있을 때야 괜찮지만 일행이 있을 때는 먼저 가시라고 해도 막무가내로 내 핸드백을 들고 화장실 앞을 지켰다. 내가 어리버리하고 길눈이 좀 어두우니까 그런 배려를 하는 것이지만, 일행 중에 딱 그 이 혼자만 그러니 내가창피하다고 해도 마이동풍이었다.
여행을 다니는 것이 우리 부부에게는 유일한 휴식이었다. 남편이나 나나 평소에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채 여유를 갖고 하루 쉬어 보는 게 소원이었지만 끝내 그래 보지 못했다. 그래서 우리에게 여행은 휴식과 동시에 내일을 위한 충전의 의미가 강해서 그야말로 행복한 시간이었다.
물론 여행이라는 것이 갈 때야 기대도 크고 행복하지만, 막상 떠나면 그때부터 고생이 시작된다. 하지만 나한테는 적어도 두 가지만은 틀림없는 행복이었다. 첫째는 책을 읽거나 메모를 하거나 사색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집에 있을 때는 바빠서 그럴 짬을 내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꼭 책을 몇 권씩 가져가 비행기나 버스 안에서 독서삼매경에 빠지곤 했다. 장거리 버스여행 때도 똑같은 풍경만 몇 시간씩 계속되면 남들은 "지겹다, 지겨워" 하는데 나는 책을 읽으니 그럴 일이 없었다. 다행히도 하느님은 버스 안에서 책을 봐도 멀미를 하지 않는 선물을 나에게 주신 덕분이다. 그러면서 메모도 하고 생각도 하고 그러면 하나도 안 지겨운데……
또 하나의 행복은 비행기나 버스로 이동을 할 때 충분한 수면을 취할 수 있다는 것이다. 평소 집에서는 길어야 5시간, 바쁠 때는 한두 시간밖에 못 자니, 장거리 여행은 그야말로 나에겐 축복인 셈이었다.
남편은 해외 기계전시회에 갈 일이 있으면 웬만하면 나를 꼭 동반했다. 가서는 기계들을 보면서 감탄을 쏟아냈다. “야, 이거 대단한대! 굉장하죠, 여보?”
그렇게 꼼꼼히 살펴보다가 자기가 사고 싶은 기계 앞에 다다르면 반응이 그때부터는 감동을 받는 수준으로 업그레이드 된다. “이 기계는 우리 공장에 꼭 필요할 것 같은데. 이게 있으면 업무에 큰 도움이 될 거야.”
그렇게 감탄을 거듭하고 공장에 필요하다고 강조하면 나한테서 나올 반응은 뻔하다.
“이 걸 꼭 사셔야 해요?”
“그럼요! 있으면 좋지요!”
그런 방법으로 내 허락을 받아내곤 하였다. 일방적으로 결정을 내리거나 우격다짐으로 밀어붙이지 않고 유연하고 자연스럽게 유도하여 허락을 받아내는데, 하지만 내가 반대하는 건 될 수 있으면 안 했다.
나는 오늘의 성공이 거의 모든 일을 둘이서 합의 하에 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생각한다. 늘상 부족한 나를 항상 존경하고 격려해 준 것이 남편의 훌륭한 덕목이지만, 그랬기에 더더욱 시너지 효과가 났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그런 계기로 나는 세계 각국을 다니며 구경도 많이 하고 견문을 넓힐 수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