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남기계가 제재단지에 자리 잡은 곳의 주소는 석남동 223번지였다. 그래서 그 단지에 있는 사장님 스물네 분이 결성하고 있던 친목계가 ‘223친목계'였다.
남편도 단지 내의 규칙에 의해서 가입하였는데, 회원 분들이 제재사업을 오래하여 이미 기반이 잡힌 연세 드신 분들이었고, 고생 또한 많이 하여 절제있고 훌륭한 분들이었다. 다만 서울의 금성중기협의회 사장님들이 버는 것도 크고 쓰는 것도 굵은 윤택한 분들인 데 비해, 이분들은 아껴 쓰고 여행을 가도 국내만 갔다. 그래서 남편이 가입하여 해외 바람을 넣었다.
“어르신들, 외국 좀 가십시다. 다리 성하실 때 가셔야지 다리 힘 빠지면 가셔서 구경도 못 하셔요.”
그래서 부부동반으로 외국여행을 몇 번 간 적이 있었다. 부인들 모임도 만들어 내가 총무를 봤다. 목재단지 최초의 김문수 회장님이 지금도 회장님이시고, 부인이신 김옥희 사모님이 부인들 모임의 회장님이시다.
특히 김옥희 회장님은 글래머 스타일에 체격도 있으시고 영화배우처럼 멋있고 잘생긴데다가 지혜롭고 박식하시다. 회장님과 나는 둘이서 굵은 철근을 놓고 콘크리트를 부어 모임을 단단히 만들겠다고 다짐하였고, 활성화시키는 데 최선을 다한 결과, 모두들 친자매들처럼 재미있게 지내고 단합도 잘 되었다. 여자들 모임이 그러니 사장님들 모임도 마찬가지로 잘돼 나갔다.
남편은 모임에서 분위기 메이커로서 바람을 잘 잡았다. 2002년 월드컵 때 남편은 '우리나라가 8강에 들어가면 2백만 원을 내겠다'고 했다. 사람들이 사인을 하라고 해시 서약서까지 썼는데, 그 영향으로 다른 분들도 덩달아 50만 원, 백만 원씩을 낸다고 썼다. 결국 우리나라가 4강에 들어 남편은 친목회에 기꺼이 2백만 원을 냈고 다른 분들도 약속한 대로 내서, 그걸로 지중해 여행을 다녀오기도 하였다.
|
|
| ▲ 가족과도 형제와도 같은 223친목회의 그리스 여행 (2002. 12.) |
|
우리 국민들에게 2002년 6월은 생애 최고의 행복으로 영원히 남을 것이겠지만, 우리 부부는 본의 아니게 월드컵 경기 때문에 몹시 고생을 하기도 했다.
마침 월드컵 경기 중이었는데, CAE와의 이사회에 참석하기 위해 벨기에에 갔을 때였다. 모든 일정을 마치고 귀국을 하기 위해 호텔에서 체크아웃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밖에서 요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강적 러시아를 이긴 기쁨에 들뜬 시민들이 너도나도 뛰쳐나와 카퍼레이드를 펼치고 경적을 울려대는 열광적인 분위기가 거리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때 우리나라도 폴란드를 격파하고 1승을 올리고 있을 때였으니, 같은 승자로서의 흐뭇한 마음으로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 바람에 여행가방 위에 올려놓았던 자그마한 색을 도선생이 슬쩍해가는 것을 보지 못한 것이었다. 그 잠깐 사이에 남편과 둘이 나란히 서 있다가 멍하니 당한 것이니 참으로 어이가 없는 일이었는데, 그 안에 여권이며 비행기표며 지갑 같은 귀중품이 다 들어 있어서 결과는 대단히 혹독했다.
대사관에 가서 여권을 새로 발급받고 이것저것 분실신고 하느라고 뛰어다니며 고생한 생각을 하면 지금도 머리가 욱신거린다.
223친목계에 가입할 때는 젊은 층에 속했는데, 지금은 운명하신 사장님 네 분을 비롯해서 회사가 잘 안돼 탈퇴하신 분들이 많아 모두 열세 분으로 줄어들고 중간쯤이 되었다. 하지만 사모님들은 내가 싱글이니까 열두 분이다.
남편이 운명한 후 모임에서 빠지려고 했지만 여러분들이 싱글이면 어떠냐고 극구 말려서 계속 씩씩하게 나가고 있다. 하지만 막상 모임에 가면 남편 생각에 우울한 마음이 나를 휘감곤 한다.
‘다른 분들은 다 건재한데 왜 이 양반만 먼저 갔어야 했나!’
그런 생각에 속이 울렁거리고 심장이 뛴다. 하지만 전혀 내색을 하지 않고 있다가 돌아와서는 혼자 한껏 울음을 쏟아내곤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