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정부 호원동에 살 때, 옆집에 남편의 회사 동료인 허정남 씨가 살았다. 그 댁과 참 친하게 지냈는데, 우리는 월셋방에 살면서 딸만 둘인데 반해 그 집은 남매를 둔 데다가 자기 집까지 지니고 있었으니 항상 나에겐 선망의 대상이었다. 게다가 부지런한 두 부부가 집을 항상 쓸고 닦고 깔끔하게 가꾸면서 살림도 알뜰살뜰하게 하여 나에겐 행복한 가정의 표상처럼 보였다.
그런 집에 그늘이 드리운 것은 허정남 씨의 건강문제였다. 위장이 너무 나빠서 회사생활을 계속할 수 없었고, 결국 요양을 겸하여 시골에 가서 산다고 충남 성환으로 이사를 하였다. 그런 행복한 가정을 이루는 것이 내 꿈이었는데, 건강 때문에 갑자기 변화되는 그 가정을 보니 너무나 안타깝고 섭섭하였다.
허정남 씨는 그곳에서 자전거포를 내서 생계를 꾸려 나갔는데, 설상가상으로 어느 날 작업을 하다가 사고로 크게 다쳐 하체 마비 장애인이 되고 말았다. 그동안 딸을 또 낳아 세 아이들까지 모두 다섯 식구가 어렵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지경이 된 것이다.
나는 점심도 굻어 가며 부업을 하여, 아이들 학용품 사는 데 보탬이라도 되었으면 해서 그 돈을 보내주기를 오랫동안 지속했다.
그러면서 허정남 씨와 편지 왕래를 자주 하였는데, 어느 날 이런 편지가 도착했다.
‘제가 부업이라도 하고 싶으니 땅을 좀 사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당시 창업한 지 얼마 안 되어 우리도 빚을 내 돈을 쓰고 있을 때였다.
남편에게 조심스럽게 의논한 결과, 어려울 때 남을 도와주는 것이 보람된 일이라고 판단하여 430평의 앞마당 땅을 사주었다. 물론 빚을 얻어서 사준 것인데, 거기에 앙고라토끼를 기르면서 기계를 들여다 놓고 가공업을 하였다. 그나마 그 일로 미래에 작은 희망을 가지게 된 것이다.
그 후 비록 휠체어에 몸은 의지하고 있지만, 허정남 씨는 용기를 내어 의욕적으로 일하며 사시다가 백혈병을 얻어 그만 타계하고 말았다. 나는 남편과 의논하여 천안공원 묘지에 안장시켜 주었다. 지금 그 자매님은 첫째와 둘째를 결혼시키고, 자신도 직장에 다니면서 간호사 막내딸과 행복하게 잘살고 있다. 아이들 결혼시킬 때 두번 다 다녀왔지만, 올 곧게 잘 성장해준 것이 나한테는 큰 보람으로 남아 있다.
그 어려운 가운데서도 허정남 씨를 도울 수 있었던 것은, 이해심 많은 남편과 하느님의 은총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본격적인 봉사활동은 부천에 와서 비로소 시작되었다. 각종 단체며 부녀회며 지역 활동을 통한 봉사활동이 먼저였는데, 점차 성당 레지오 봉사활동 쪽의 비중이 커져 갔다.
나는 한 번 시작하면 뭐든지 집중해서 하는 성격이기에 봉사 역시 열심히 했다. 그러다 보니 봉사를 하면서 남편한테 혼이 난 적도 많았다.
한 번은 어느 가난한 집의 가장이 결핵암으로 숨을 거두었는데, 일찍이 부인이 가출하여 할머니와 올망졸망한 아이들 넷만 남아 있었다.
소식을 듣고 가보니 시신을 덮을 이불조차 변변한 게 없는 것이었다. 간신히 덮을 것을 찾아 시신을 가려놓으니 얼굴과 가슴만 가려지고 아랫도리는 훤히 드러났다. 그런 상황에서 그냥 나을 수가 없어서나 홀로 시신 옆에 앉아 있다가 밤도 깊고 너무 피곤하여 깜빡 졸고 말았다. 그러다 눈을 떠보니 시신에서 복수가 빠져 방바닥을 흔건히 적시고 있었다. 때가 한여름인지라 악취가 코를 찌르고 무서울 법도 했지만 깊은 신앙심 덕분인지 아무렇지도 않았다.
아침이 되어 식구들 밥을 해주어야 했기에 서둘러 집에 돌아오니, 남편은 머리끝까지 화가 나 있었다.
“남들은 봉사를 해도 밤이면 집에 와서 자는데, 당신은 애까지 있는 분이 왜 그러시오?”
그렇게 한참 혼이 났다. 그 집의 딱한 사정을 말씀드려 이해를 구하고, 남편을 출근시킨 다음 장례에 필요한 것을 준비해 가지고 장례를 치러 드렸다. 그 후 아이들은 엄마에게로 가고, 나는 홀로 남은 할머니를 몇 년간 보살펴드리다가 나중에는 양로원으로 보내드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