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인의 삼우제까지 치르고 슬퍼할 새도 없이 AFT에서 통보가 왔다. 3월 10일이었다. 그 전에 남편이 투병 중일 때도 민선이가 대표로 승인해달라고 청을 넣었지만 이사회에서 승인을 안 해 주었다. 3월 25일에 ‘주총’이 있으니까 만나서 얘기하자는 말뿐이었다.
그런데 남편이 갑자기 운명하여 다시 승인 신청을 보낸 다음, 민선이가 장사를 치르고 출근했는데 이메일이 와 있었다.
‘주주간 계약서 3·4 조항을 보시오’
계약서의 그 조항을 보니 단 한 줄이었다.
‘주주가 죽거나 회사가 파산했을 때 주식을 양도한다’
남편도 모르고 아무도 모르는 조항이었는데, 민선이는 전부터 ‘카리’ 씨와는 달리 AFT의 사장에게 안 좋은 느낌이 들었다고 말했었다.
AFT측의 의도를 알아보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동안, 이라크 전쟁이 발발하여 모든 비행기가 못 뜨는 바람에 주총회에 오려던 사람들이 발이 묶이고 말았다.
계약서 조항의 옵션은 토요일·일요일을 빼고 영업일 15일 이내에 결정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변호사 선임을 하기 위해 로펌을 여러 군데 다녔는데, 하나같이 다 부정적이었다. 내용이 너무 명명백백해서 어떻게 손을 써볼 도리가 없다는 것이었다. ‘못 하겠다’ 하면 중재로 가야 하는데 승소하기도 힘들 것 같거니와 괜히 시간만 낭비할 것 같다고 했다. 정 안 되면 기계하고 직원들을 다 빼버리고 완전히 껍데기 회사를 만들어버리고 넘겨주는 편법을 쓸 수도 있다고 했다. 하지만 사회에 첫발을 내딛는 우리 아이들에게 그런 식의 편법은 보여주어서도, 쓰게 해서도 안 되는 일이었다.
영화나 소설 속에서나 볼 수 있었던 상황이 현실로 나에게 닥칠 줄이야……. 억장이 무너지고 세상이 원망스럽고 모든 것이 싫었다. 민선이는 회사에 계속 출근하면서도 직원들에게 말을 했다간 회사가 돌아가지 않을까봐 언급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다음날 민선이가 카리 씨와 통화를 했는데, 카리 씨도 깜짝 놀라며 몰랐다고 했다. 그래서 카리 씨한테 AFT측의 의도를 알아봐 달라고 부탁한 결과, 팔려는 의도는 없는 것 같고 사겠다는 쪽인 것 같다고 했다. 2001년 결산 자료를 보고 사려는 거였다.
<김앤장> 로펌에 가서 나하고 두 딸이 참석한 가운에 AFT측과 화상 회의를 하였다. 계약 자체가 그렇게 돼 있으니, 주식을 일부분은 안 되고 65%를 통째로 다 내놓으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제안하기를, 주식 15%를 가지고 월급사장을 하라고 했다. 한국은 금속노조가 강하니까 노조원들의 반발을 그런 식으로 무마하려는 의도였다.
회의를 진행하는 동안 딸아이의 판단 하나하나가 중요한 결과로 이어지는 만큼 모두들 초긴장 상태였다. 그러니 회의를 주관하는 딸아이는 오죽했으랴. 그걸 지켜보는 에미의 심정은 너무도 안쓰러워 입술이 새까맣게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생각해 보겠다고 답변을 보류한 채 회의를 마쳤다.
최종 제시가 나왔으니 결론을 내려야 했다. 민선이는 너무 억울하니까 싸우자는 입장이었다. 풍남이 이익가치는 좀 떨어졌고 문제성이 없는 건 아니지만 장래성이 있는 회사니까 AFT측도 사려고 드는 것이라는 논리였다.
나하고 재선이는 그냥 넘기자는 쪽이었다. 아빠도 너무 힘들어서 팔려고 생각한 것이니까, 어쩌면 이게 기회일 수도 있다고 했다.
민선이는 초등학교 때부터 사업하는 것이 꿈이었다. 하지만 억울하다고 하면서 끝까지 가는 것이 과연 현명한 것인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고 했다. 염 이사님도 나쁜 가격은 아니니 생각해 보자는 의견을 피력하였다.
결국 나는 결단을 내려, 정리하고 파는 쪽으로 결론을 내렸다. 그렇게 통보하여, 4월 14일에 그쪽 이사 2명과 회사에서 만나 모든 문제를 의논하여 계약서를 작성하였다.
문제는 직원들의 오해였다. 아버지가 타계하니 물려받은 주식을 팔고 빠지려 한다고 오해하여 직원들이 마음의 상처를 받고 있었다. 그래서 계약서에 서명을 하기로 한 날 아침, 나하고 재선이도 참석하고 3층 회의실에 직원들을 모이게 하여 민선이가 마지막 프리젠테이션을 하였다.
계약에 어떤 허점이 있었고, 문제가 제기된 후 누구누구를 찾아가고 어떤 로펌에 갔으며, 왜 팔 수 밖에 없는지, 그리고 팔지 않고 중재로 갔을 경우의 상황까지 조목조목 설명했다.
직원들 생계가 달린 일인데, 중재가 6개월이고 1년이고 끌다가 잘못되면 임금까지 동결될 수 있다, 월급 없이 살 수 있느냐, 그러면 회사에 몇 명이나 남아 있겠냐고 반문을 했다. 나가서 다시 만들자는 분들도 있었지만 그런 건 어렵다고 설명회를 마쳤다. 그리고 AFT측에서 사람들이 와서 사인을 해주고 모든 걸 끝냈다.
나는 그때 슬픔에 못 이겨 먼저 집으로 돌아왔는데, 12시쯤 회사 직원들이 밖에 다 나와 있는 가운데 민선이와 재선이는 한 분 한 분 다 악수하고 인사를 드린 다음 회사를 떠났다.
두 아이는 하루아침에 아빠의 숨결이 온전히 깃든 회사를 송두리째 잃었고, 직장마저 잃은 것이다. 그렇게 해서 한 위대한 남자가 만 19년 동안 피와 땀을 다해 이룩했던 풍남 스크린은, 고인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의 곁을 떠나버리고 말았다.
어떻게 시작하고, 어떻게 지켜오고 키워온 회사인데 이렇게 마무리를 해야 하다니……. 19년 동안 남편이, 그리고 우리가 풍남과 같이 웃고 울었던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