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년 여름이었다. 무더위가 극성을 부릴 때라 남편은 퇴근하자마자 샤워를 하고 나왔다. 그 때나 지금이나 살집이 풍성해서 땀을 많이 흘렸다. 나는 그런 남편을 위해 간간한 냉이국을 준비해 놓고 있었다. 부리나케 저녁상을 차리려고 하는데, 그날따라 남편이 좀 앉아 보라며 손을 잡아끌었다.
“여보, 당신하고 의논할 게 있어요.”
“뭔데요?”
“나도 이제 내 사업을 하고 싶어서 말이오…….”
“또 그 말씀예요? 얼른 진지 잡수세요.”
그즈음 남편은 부쩍 자기 사업을 하고 싶다는 말을 자주 했다. 처음 세일기계가 서울 독산동에서 터를 잡고 출범할 때부터 공장장으로 일한 지 7년째 접어들던 때였다. 세일기계는 고오석 사장님의 탁월한 사업 수완에 힘입어서 부천시 내동에 큰 공장을 지어 이전할 만큼 날로 번창하고 있었다. 물론 거기에는 남편의 공도 적지 않게 들어 있을 것이다.
“아뇨, 당신하고 꼭 상의를 해야 돼요. 돈 대겠다는 동업자가 나타났어요.”
“아직 사업하기는 좀 그렇잖아요? 동업한다는 것도 좀 그렇고…….”
“내가 사업할 형편은 안 되는데 하고는 싶으니 동업밖에 방법이 없지 않아요?”
“그분이 사업 자금을 댄다면 그게 무슨 당신 사업이에요? 나중엔 그분 사업이 돼버리고 말지.”
“나도 좀 대야죠.”
“우리가 돈이 어딨다구요?”
“당신 지금 있는 돈 모두 모으면 얼마나 되죠? 적금 깨고 저축한 것 해서, 돈을 되는대로 좀 모아줘요.”
“글쎄요. 그런 푼돈 가지고 무슨 사업을 하신다구요. 여보, 다시 생각해 보시면 안 돼요? 전 어째 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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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야유회에서 패기넘치는 시절의 남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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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는 능력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성실했다. 세일기계 이전의 대한펄프에 다닐 때도 최화식 사장님한테 근면상·성실상 등등 상도 많이 받았고 동료들보다 승진도 일찍 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회사 출근은 항상 정확히 했고, 결근은 물론이고 조퇴조차 한 번 해본 적이 없었다. 새벽 한두 시까지 술을 마시고 들어온 날도 새벽같이 일어나 일본어학원에 들러 강의를 받고 출근하는 일을 하루도 거른 적이 없을 정도였다. 대한펄프의 고오석 전무님이 자기 사업을 시작하면서 공장장으로 첫 번째 스카우트 한 사람도 그 이였다. 그 이의 성실성이 믿음을 주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우리 집 살림은 늘 쪼들렸다. 남편이 받는 월급만으로 따지면 쪼들릴 리가 없었지만, 월급을 받으면 무조건 3분의 2를 뚝 떼어 적금을 넣거나 저금을 하기 때문이었다. 공장장이라는 자리가 자재 구입도 맡아서 했기 때문에 돈의 유혹이 참 많았고, 집 살림 형편을 남편 자신도 잘 알고 있을 테지만 잘못된 돈을 탐한 적은 없었다.
출장을 가서도 출장비를 워낙 아껴 써서 남기고는 했는데, 그대로 가져가서 회사에 반납할 만큼 공과 사가 분명한 양반이었다. 예를 들어 출장을 갈 때도 고속도로 통행료는 회사 카드를 쓰고, 휴게소에 들러서 물 한통을 살 때는 자기 카드를 쓰는 식이었다.
공과 사를 분명히 하는 것이 그 이의 제1의 철칙이라면, 애국은 두 번째 철칙이었다. 국산품을 애용하는 것이 애국이다, 교통신호 잘 지키는 것도 애국이다, 사회 질서 잘 지키는 것도 애국이다, 공장에서물건 잘 만들어 내는 것도 애국이다…… 그래야 국가가 부강해지고,국가가 잘되어야 개인이 잘된다는 주의였다. 그래서 가끔 애들 학용품 중에서 일본제 볼펜 같은 걸 발견하면 당장 압수하고 국산 볼펜을 대신 사주곤 했고, 부하 직원들의 잘못을 나무라는 데에도 반드시 '애국'이 등장하곤 했다.
“우리가 제품을 제대로 만들어야 우리 회사가 잘되고, 회사가 잘돼야 나라가 잘되는 거야. 애국이 무슨 거창한 건 줄 알아! 자네는 맡은 일 열심히 성실하게 하는 게 애국이고, 나는 매출 많이 올려서 사원들 봉급 많이 주고 세금을 많이 내는 게 애국인 거야! 나라가 잘돼야 자네 집이나 나나 다 잘살게 될 거 아냐!”
그렇게 국가관이 철두철미하고 성실하기 그지없는 양반이었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긍정적인 입장에서 바라본 관점 이고, 다른 시각에서 보면 또 그게 아니었다.
“형은 사업 같은 거 하면 안 될 사람이야. 저렇게 앞뒤가 꽉 막혀서야 어떻게 사업을 하겠어. 사람이 좀 배포가 두둑하고 사교성도 있고 임기응변도 있어야지.”
일찍부터 제과 기술자로 돈을 많이 번 큰 시동생의 말이다.
“맞아. 사업하려면 둘러치고 메칠 줄도 알아야 하는데 큰오빠는 너무 얌전하고 고지식해. 천상 샐러리맨 타입이라니깐.”
이건 시누이들의 한결같은 말이었다.
그런 양반이 사업을 하겠다고 나선 것은, 소규모로 시작한 세일기계가 10년도 안 되어 10배쯤 사세를 확장하는 것을 보고 자신감을 가졌기 때문인 것 같았다. 고오석 사장님이 회사 경영하는 것을 옆에서 지켜보며 ‘나도 내 사업체를 가지고 돈을 벌어야겠다’는 야망도 가지게 된 것이다.
그러나 시댁 식구들 말마따나 반듯하고 예의바르고 고지식하고 얌전한 남편은 내가 생각해도 사업가 타입이 절대 아니었다. 돈도 돈이었지만, 그런 근본적인 이유 때문에 사업에 반대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남편은 이번 기회를 놓치면 다시는 사업을 못하게 될 사람처럼 고집을 부렸고, 여느 때처럼 한마디 툭툭 던지던 것과는 달리 매우 진지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