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부터 남편과 나 사이에는 실랑이가 벌어졌다. 그런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 이는 고집이 무척 세서, 한 번 무슨 마음을 먹으면 끝끝내 관철시키고 마는 타입이었다. 다만, 금방 그 자리에서 우격다짐으로 허락을 받아내는 게 아니라 “그래요?” 하고 하룻밤 잔 다음에 다음날 또 얘기하고, 또 “그래요?” 하고 하룻밤 잔 다음에 또 얘기하는 식이어서, 결국은 상대가 진이 빠져서 양보하고 마는 것이다.
그때도 그래서, 나는 계속 반대를 하면서도 마음은 남편이 예전과 달리 하도 하고 싶어 하니까 해주는 쪽으로 기울어 가다가 결국은 손을 들고 말았다. 돈을 마련해 놓기로 한 날, 막내딸을 업고 내가 거래하는 은행으로 갔다. 다달이 부어 오던 정기적금을 모두 해약하고예금돼 있던 돈까지 찾으니 1천 3백만 원쯤 되었다. 그 돈으로는 어림도 없는 일이어서 그 지점의 차장님을 찾았다.
“차장님, 사정이 있어서 돈을 좀 써야 되겠습니다. 부족해서 대출도 좀 받아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요? 그동안 아주머님의 신의를 봐서 제가 해드리겠습니다. 필요해 지면 오십시오.”
정기적금을 모두 해약하여 다른 담보물도 없는데 대출을 해주겠다는 것은 내가 오랫동안 은행과 거래를 해 왔기 때문이다. 작든 크든 조금씩 모아서 목돈을 만들기 위해 정기적금을 여러 개 들었고, 월급을 받으면 제 날짜를 한 번도 어기지 않고 착실하게 부어 왔던 것이다.
“항상 보면, 아주머님은 참 성실하게 사십니다.”
매번 애기 업고 입성도 초라한 아줌마인 나를 그렇게 인정해준 것만도 고마웠는데, 그런 믿음이 이런 때 중요하게 쓰이게 될 줄은 미처 몰랐다. 하지만 '대출은 사업을 시작하게 된 다음에 받으면 되겠다' 생각하며, 찾은 돈만 집에 갖다 놓았다.
그때부터 가슴이 뛰기 시작하는데, 막상 돈을 찾아다 놓으니 무척 걱정이 되는 것이었다. 궁리 끝에 아이를 업고 친정 큰올케를 찾아갔다. 큰올케는 그때 전도사가 되기 위해 열심히 교회를 다니고 있었다.
“언니, 우리 그 이가 사업을 하고 싶어 하는데 어디 예언기도 잘하시는 분 있으면 소개좀 해주세요.”
예언기도라는 건 이를테면 점을 보는 것인데, 명색이 내가 성당을 다니는데 점집에 갈수는 없으니 올케에게 부탁을 한 것이다.
“제물포 역전 근처에 가면 예언기도를 잘하시는 분이 계시지. 내가 약도를 그려줄 테니까 찾아가 봐. 예언이 참 잘 맞는다고 소문난 분인데, 내가 전화를 해놓을게.”
그런 분을 개신고 점쟁이, 천주교에서는 천주교 점쟁이라고 했다. 제물포역까지 버스를 타고 가 근처에서 지나는 사람에게 물어 그 집을 쉽게 찾았고, 나는 그분에게 찾아온 목적을 말씀드렸다. 그분은 굉장히 두터운 성경책을 상 위에 놓고 있었는데, 두 눈을 감고 그걸 죽 훑다가 어느 페이지를 딱 펼쳤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어느 구절을 읽어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너는 지금 안 해도 이 다음에 하면 승승장구 잘될 것이다.”
“이 다음이라면 전도사님, 언제 하면 될까요?”
“40부터 하면 잘 될거야. 지금 동업하면 안 돼. 40부터 하면 불같이 일어날 것이고…….”
“40부터요? 고맙습니다.”
봉헌금 조금 드리고 그 집을 나왔다. 40이라면 그때 남편이 우리나이로 38세였으니 2년쯤 뒤였다. 그런데 그보다는 동업을 하면 안 된다는 말이 더욱 걸렸다. 그때부터 다시 고민이 시작되었다. 돈을 준비해 놓겠다고 약속을 했는데, 그리고 남편도 동업자 분한테 돈을 내겠다고 약속을 단단히 했을 텐데 안 된다고 하면 남편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될 것이다.
내 말을 들어줄까? 안 들어주면 어떻게 해야 하나. 남편이 끝내 고집을 부리면…… 자기 체면 손상 때문에 화를 내면 어떡하나? 내 말을 들어준다 해도 남편의 신용에 금이 갈 텐데…… 그건 또 어떡하나? 안절부절못한 채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며 걱정, 시름에 빠져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데, 저녁 8시쯤 드디어 전화가 왔다.
“여보 저예요. 여기 희망다방인데, 지금 돈 가지고 나오세요.”
“예, 민선아빠. 잘 알겠는데요, 짧은 소견이지만 제가 보기에는 안 될 것 같아서 말이에요…….”
“왜요? 무슨 말 들으셨어요?”
“글쎄, 그럴만한 일이 있어서 그래요. 그냥 들어오시면 안 될까요?”
“얘기를 해보세요.”
“전화로는 못해요”
“그래도 괜찮으니 해보세요.”
내가 안 된다고 말했는데도 생각 외로 남편의 목소리는 평온했다. 나는 거기에 힘입어, 그 기도 받은 얘기를 꺼냈다. 그러자 그 이는 “알았어요.” 하고 짤막하게 답변을 한 다음 전화를 끊었다.
남편이 그렇게 담담하게 내 말을 받아주는 것이 너무나 고마웠다. 하지만 그러고 나면 남편의 입장이 대단히 난처해질 텐데 하는 생각에 전전긍긍하며 초조감에 휩싸여 있는데, 남편은 자정이 다 돼서야 술에 몹시 취한 채 귀가했다.
집에 들어와서는 현관에 털썩 하고 앉더니 구두를 내던지듯이 벗으며 만취한 목소리로 말했다.
“여보, 내가 내 체면이 아무리 땅에 떨어지고 남자의 기백이 흩어져도 당신이 반대하는 일은 못해요! 암, 당신이 반대하면 못하지, 못 하고 말고!”
'역시 내 남편이다, 정말로 믿고 따를 만한 사람이다…….’
나는 새삼 넓지막한 남편의 가슴을 느끼면서 남편에게 존경심을 갖게 되었다.
그 대신 나는 한 가지 약속을 남편에게 해주었다.
“여보, 40살만 되면 당신이 잘된대요. 그러니까 40살만 되면 무조건 사업을 하실 수 있도록 해줄게요.”
“그래요, 고마워요. 알았어요.”
그러면서 웃저고리를 어렵게 벗어놓고는 기다시피 하면서 목욕탕으로 들어갔다.
불안에 떨고 이것저것 모든 게 걱정되는 상황에서 내 의견을 순순히 받아들여 준 남편, 남자 체면이 땅에 떨어지는 것도 아랑곳 않고 아내를 존중해주는 남편에게 너무나도 감사했다.
그때의 감동이 얼마나 컸던지 연신 “난 당신이 반대하는 일은 안 해요. 암, 그럼!” 하면서 목욕탕으로 들어가던 그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