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일생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바이러스에 의해 생기는 일본 뇌염과 유행성출혈열이라는 무서운 질병과의 싸움이었다고 말 할 수 있다. 바이러스란 크기가 세균보다 훨씬 적은 미생믈로 보통 현미경으로는 볼 수 없으며 10만배 이상 확대되는 전자 현미경으로만 볼 수 있다. 또한 세균은 아무데서나 잘 증식하는 반면, 바이러스는 살아있는 세포 안에서만 기생하며 스스로는 번식하지 못해 숙주세포가 복사해주는 까다로운 원시적인 생물체라고 할 수 있다. 감기처럼 가벼운 질환을 일으키기도 하지만 뇌염이나 에이즈처럼 치명적인 병을 유발할 수도 있다.
바이러스 질병의 약물치료는 현대의학이 풀어야 할 숙제이기도 하다. 세균성 질병은 항생제로 치료할 수 있지만 바이러스성 질병을 치료할 수 있는 약물은 아직까지 개발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뇌염바이러스 연구에서 시작해 내가 한국에서 세계 최초로 발견한 한탄 바이러스와 백신까지, 반세기에 걸친 나의 연구 생활은 온통 바이러스로 점철돼 왔다. 이젠 바이러스가 무섭지도 밉지도 않은 친숙한 존재로 느껴질 정도다.
바이러스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순전히 내가 평생 스승으로 모셨던 고 기용숙(奇龍肅. 1975년 작고) 교수와의 만남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기 교수를 처음 만난 곳은 6‧25동란 중인 1952년 피난지 부산 시내에 있는 전시연합대학의 강의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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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시(戰時) 부산 광복동의 서울대 의대 (1952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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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는 전쟁 중이었으므로 부산 광복동에 있는 동주여상에 임시막사를 세워놓고 서울대의대를 비롯해 세브란스의대, 수도여자의대(고려대 의대 전신), 이화대의대 등 4개 의과대학과 치과대학이 통합 강의를 실시할 때였다. 그해 3월 본과 2학년이 된 우리에게 미생물학을 가르치러 강단에 나타난 기 교수는 160센티미터 정도의 단신에 다부지고 건강한 모습이었으며 파란색 해군 점퍼에 군화를 신고 있었다.
기 교수는 특히 시험 때만 되면 학생들을 골탕 먹이고 못살게 구는 까다로운 교수로 악명이 높았다. 재시험을 보는 학생들이 80퍼센트일 정도로 어려운 문제만 골라내기 때문에 두세 차례 이상 재시험을 보지 않은 학생이 드물 정도였다.
시혐문제도 언뜻 보면 간단해 보이지만 막상 답을 쓰려고 하면 내용을 정확히 알아야만 풀 수 있는 것들이었다. 항원(抗原)의 정의를 두 줄 이내로 설명하라는 주관식 문제를 붙잡고 끙끙거렸던 기억이 아직도 기억에 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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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용숙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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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도 무척 독특했다. 낡은 강의 노트를 들고 다니며 칠판 위에 매년 비슷한 내용을 반복하는 다른 교수와는 전혀 달랐다. 본인이 직접 그린 세균 독소의 실험 성적이 든 도표를 들고 와 흑판에 걸어놓고 항원과 항체의 반응을 설명하고 질문하는 이른바 토론식 시청각 교육을 선보였다. 교수는 말하고 학생은 받아쓰는 틀에 박힌 수업 대신 교수가 질문을 하고 학생이 답하는 서구식 토론방식을 선호했다. 대답이 시원찮은 학생에겐 불호령이 떨어지기 일쑤였다.
배고픈 전시의 어수선한 분위기가 그에겐 전혀 통하지 않았다. 시험 때 커닝하는 학생을 질타하는 것으로도 유명해 학생들에게는 어느새 괴짜 교수로 통했다. ‘괴짜’라는 말과 그의 성을 결합한 ‘奇짜박사’라는 별명도 붙었다.
그는 항상 솔직하고 직설적이었다. 그에게 면박을 당한 사람도 부지기수였으며 동료교수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조교 시절 한번은 내과 교수들과 같이 한 미생물학 세미나에서 내과의 전종휘 교수에게 “그것도 몰라? 그래서 어떻게 환자를 진료해!”라며 면전에서 호통을 치는 것도 보았다. 타협할 줄 모르는 그를 학생들이 좋아할 리 없었다. 그러나 그러한 기 교수에게 내 마음이 끌리게 된 것도 어찌보면 내 운명이었고, 오늘날의 나를 있게 한 인연의 시작이 아니었나 싶다. 나는 학생 때 매사에 철저한 그를 통해 학문에 대한 매력을 느끼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누구보다도 조국을 사랑한 애국자였다. 1941년 서울대의대의 전신인 경성의전을 졸업한 그는 한국전쟁 직전인 1949년부터 디프테리아를 일으키는 세균이 분비하는 독소를 연구하기 위해 미국 피츠버그 대학에 유학 중이었다. 그러나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1952년에 자진 귀국하여 해군문관으로 지원해 부산 검역소에서 복무했다. 비록 전장에서 총을 잡은 것은 아니었지만 전쟁으로 피폐해진 모국에 돌아온 그의 애국심은 젊은 나에게 감명을 주기에 충분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