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교수와의 마찰 (제8화)

미국에 온지 1년 반이 지난 어느 날 시버튼 교수가 나를 불러 내친 김에 박사학위까지 따고 한국에 돌아가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물어보는 것이 아닌가. 의학미생물학에서 최고 점수를 딴 것이 크게 작용했는지 교수회의에서 내게 박사과정에 들어가도록 한국정부에 추천하기로 결정했다는 것이었다.

원래 서울대학의 계획은 조교들은 2년 과정의 석사만 마치고 귀국하는 것인데 나로선 큰 행운이 아닐 수 없었다. 지금이야 미국박사가 흔하지만 당시엔 매우 드물고 어려운 일이었다.

그럼으로써 같이 온 다른 동료 조교들은 2년의 석사과정을 마치고 돌아갔지만 나는 서울대의대의 허락을 거쳐 2년의 석사과정을 마치고 다시 박사과정마저 끝내고 돌아가게 되었다.

경사는 겹쳐 온다던가. 돼지새끼 콩팥에서 세계 최초로 일본뇌염 바이러스를 배양하는데 성공한 나의 석사논문이 1958년 미국의 저명한 의학잡지인 <프로시딩스 오브 익스페리멘탈 메디신 앤드 바이올리지>에 제1 저자로 게재되었다.

그러나 박사과정의 시작은 순탄치 않았다. 원래 내가 관심을 가졌던 연구 분야는 일본뇌염바이러스 외에 토끼상피세포에서 종양을 유발하는 유두종양바이러스를 배양하는 암 연구였는데, 어느 날 갑자기 연구 주제가 바뀌어야 했던 것이다. 이유는 박사과정 첫 학기인 1957년 10월 나의 지도교수가 시버튼 박사에서 쉬러 교수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쉬러 교수는 당시 34세로 부교수였고, 일본에서 미국 육군 군의관으로 2년간 일본뇌염바이러스를 연구한 바이러스 학자로, 그가 제대하고 돌아오자마자 시버튼 교수가 그를 나의 지도교수로서 적임자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그가 지도한 첫 번째 박사학위 지망학생이 됐다.


	▲ 나의 박사과정 지도교수 쉬러 박사 / 미네소타대학 의과대 미생물학 교수와 코넬대학 의과대 주임교수를 지냈다

학문의 세계도 사람 사는 사회의 일이니만큼 인간관계가 매우 중요하다. 특히 학위 과정 학생의 생사여탈권을 쥔 지도교수와의 원만한 관계는 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그 점에서 나는 불행했다고 볼 수도 있다. 자상한 아버지 같았던 시버튼 교수와 달리 쉬러 교수는 젊고 야심이 많은 매우 까다로운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에게 당한 사람은 한 두 명이 아니었다. 세미나 도중 여성 조교에게 ‘갓뎀’이란 욕설까지 거침없이 해댈 정도였다. 게다가 동양인에 대한 우월감과 그릇된 편견마저 있었다. 일본에서 군복무시절 일본인에 대한 이미지가 좋지 않았고, 한국은 그나마 일본의 식민지였다는 생각과 일본에서의 많은 범죄자가 한국인이었다는 신문보도를 읽었다면서 내겐 무척 까다롭게 굴었다. 특히 김치 냄새를 싫어해 ‘테러블’이란 표현까지 섞어가며 한국의 음식을 혐오했다.

만날 때부터 예사롭지 않은 사람이라 생각했는데 갈등은 의외로 빨리 찾아왔다. 당시 실험실은 박사과정 조교마다 무균실이 하나씩 배당돼 자신이 원하는 실험을 그곳에서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쉬러 교수는 나를 불러 어떤 연구를 수행하고 있는지 실험기록을 보여 달라고 했다. 원래 기록에는 익숙하지 않고 대충 넘어가는 국민성에 젖은 탓도 있었겠지만 나의 연구기록은 간단하고 결과만 쓴 한국식이었다.

쉬러 교수는 혀를 끌끌 차며 누가 보더라도 알아 볼 수 있게 연구과정을 일일이 기록한 노트를 다시 작성하도록 지시하는 것이었다. 1주일 후 다시 찾아가 나름대로 정리한 실험노트를 보여줬더니 여전히 노트내용이 부실하다며, 이번엔 아예 나의 연구실을 1주일간 폐쇄한다는 것이다. 연구자가 실험실을 빼앗기는 것은 참을 수 없는 모욕이며 그만두라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나는 수치심 때문에 다 때려치우고 서울로 돌아갈까 생각했다.

그러나 만일 내가 여기서 중도 포기 한다면 그것을 더욱 부끄러운 일이란 생각이 들었다. 이를 악 물고 그가 원하는 양식에 맞춰 1주일간 실험노트를 깔끔하게 다시 정리했다. 1주일 후 다시 그에게 찾아가 실험기록을 제출했더니 이번에는 웃으면서 실험실을 사용해도 좋다는 허락을 해주었다.

나는 지금도 쉬러 교수가 까다롭고 아량이 없는 사람이란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물론 뛰어난 과학자라고 해서 인간성마저 좋아야 한다고 기대한다는 것은 무리일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는 당시 일본뇌염바이러스의 최고 권위자였으며, 그의 말마따나 자신의 연구내용을 제 3자가 알 수 있도록 객관적으로 자세히 기술하는 것은 학자에게 매우 중요한 일이란 교훈을 뼈저리게 얻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