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일의 금요일>에 열린 박사학위...

식료품정에서 만난 여성들에게 어디서 왔느냐고 말을 걸었더니 서울에서 온 사람들이라고 했다. 그것도 내가 몸담고 있는 서울대 병원에서 온 것이 아닌가. 그들 역시 우리와 비슷하게 간호대학 교수요원 양성프로그램으로 선발돼 미네소타 대학에 왔다. 낮선 미국 땅에서 처음으로 만난 고국의 여성이라 무척 반가웠다. 김치를 담그려 채소를 사러 왔다는 그들을 내 차에 태워 기숙사까지 바래다줬다. 평생의 동반자인 아내 김은숙은 이때 처음 만났다. 서울대 병원에서 근무하던 아내는 내가 박사학위를 거의 마칠 무렵인 1959년 여름 미국에서 우연히 나를 만난 것이다.


	▲ 미국유학시절 아내와 데이트하며 사용했던 차종인 스튜드베이커

중고차이긴 하지만 내가 사랑하던 스튜드베이커는 아내와의 데이트에도 각별한 역할을 했다. 요즘 신문을 보면 자동차 안에서 영화를 보는 곳이 늘고 있다는 기사를 접하곤 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40년 전 미국에서 자동차 안에서(드라이브인 극장)영화 감상을 경험했던 터라 그것은 새삼스런 일이 아니었다. 미시시피 강을 따라 자동차를 몰고 다니며 연인과 함께 가을 단풍을 감상했던 추억은 아직도 기억에 새록새록 하다.

내가 아내를 만나기 시작할 무렵, 나의 학위논문은 완성단계에 이르러 있었다. 1959년 10월 나는 드디어 마지막 연구결과까지 정리해 논문을 완성할 수 있었다. 이제 남은 과제는 논문심사 통과였다. 그러나 미국 대학의 논문심사는 국내처럼 통과의례에 불과한 요색행위가 아니다. 해당 교실의 교수와 부전공 과목의 교수가 모여 일반적인 기초지식에 대한 구두시험을 치르게 한 후 논문에 대해 문구 하나하나까지 따지고 덤벼든다. 조금이라도 미심쩍거나 불완전한 부분이 있으면 논문통과가 보류되고 이를 보완한 뒤 다시 심사를 받아야 했다.

골칫거리는 논문심사 날짜를 정하는 일이었다. 네 명의 미생물학 교수와 한 명의 예방의학 교수가 함께 시간을 낼 수 있는 날짜를 갖기가 매우 어려웠다. 대학원 여직원이 가까스로 잡은 날짜가 1959년 12월 13일 금요일 오전 10시였다. 나는 의미심장하게 웃는 대학원 여직원에게 고맙다고 여러 번 인사했다. 그렇게도 바쁜 교수들의 일정이 희한하게도 이 날만은 약속이라도 한 듯 텅텅 비어 있는 것이 아닌가.

심사 전날 밤 걱정이 되어 거의 뜬 눈으로 밤을 새웠다. 예상치 못한 질문이 나올 때 어떻게 답변을 해야 할지 골몰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삐끗하면 1년을 더 기다려야 한다. 하지만 이 기간을 다시 기다린다는 것은 올해 말까지 귀국하기로 한 학교와의 약속 때문에 불가능했다.

심사 당일 심사에 앞서 연구실에서 만난 지도교수 쉬러 박사는 내게 웃으면서 물었다. 닥터 리는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아느냐는 것이었다. 영문을 모르는 나는 특별히 기억할 만한 날도 아니었기 때문에 오늘은 박사논문 심사 날이라고 답했다. 그랬더니 교회에 다니느냐고 묻는 것이 아닌가. 그러면서 그가 들려주는 말에 나는 아차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선택한 13일이 마침 금요일이었는데, 이는 기독교인들이 가장 기피하는 ‘13일의 금요일’이라는 것이다. 그나마 12월에 낀 13일의 금요일은 몇 십 년에 한번 올까말까 해 대부분의 미국인들이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집에서 그냥 쉬는 최악의 흉일(凶日)로 생각한다는 것이 아닌가.

일부러 교수들을 골탕 먹이려고 흉일을 택한 건방진 놈으로 생각하면 큰일이다 싶었다. 아무리 논문을 잘 써도 교수들이 흉을 찾으려고 들면 어떤 학생이 이를 배겨 낼 수 있겠는가. 지금까지 잘 버텨온 내가 여기서 드디어 무너지는구나 하는 생각을 하니 아찔하기만 했다. 오전 10시 교실 회의실에서 논문심사가 시작됐다. 십여 개의 질문이 있었지만 거의 완벽하게 답을 하였고, 학위논문도 훌륭하다고 칭찬을 받았다. 기대 이상의 결과였다.

그 자리에서 만장일치로 내 논문과 구술시험 통과가 확정된 것이다. 심사 후 심사장을 떠나는 한 교수가 내 어깨를 툭 치며 ‘13일의 금요일’하며 씩 웃고 나갔다. 이제와 생각해보니 오히려 나의 종교적 무지가 그들에게는 큰 흥밋거리였고 한편으론 순수하게 어필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 새옹지마의 진리가 새삼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나는 그 후 13일의 금요일의 유래를 조사하여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아냈다.

서양에서는 금요일과 13일이 겹치게 되는 ‘13일의 금요일’은 끔찍한 불행을 상징한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인류의 종말이 온다면 13일의 금요일에 있을 것이라고 말 한다. 예수는 자신이 체포돼 사형될 것을 예감하고 12명의 제자와 함께 만찬을 들었다. 식사 도중 유다가 자리를 떠나 예수를 배반하고 병사들을 불러와 예수는 잡혀갔다. 다음 날 예수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음을 당했는데, 이 날이 금요일이었다.

기독교도들은 예수와 열두 제자를 합해 13명이 모인 곳에서 유다의 배반이 일어났으므로 13이라는 숫자에 배반과 불행이 담겨 있다고 믿게 됐다. 그리고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힌 불행이 일어난 날이 금요일이었으므로 이 또한 불길함과 고통을 상징하게 됐다. 오늘날까지도 13명이 함께 회식을 하면 그 해 안에 한 명이 죽음을 당한다는 미신을 믿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