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대 호랑이선생 (제10화)

1959년 12월 21일 미국 의학박사가 된 나는 드디어 만 4년 3개월 만에 꿈에도 그리던 귀국길에 올랐다.

당시 나는 한국인으로 미국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은 세 번째 사람이었다. 일본뇌염바이러스의 면역기전을 규명한 내 논문은 이 분야에서 세계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미국면역학회’지에 당당하게 게재되었다.

미국 국무부는 미국으로 갈 때와 같이 한국으로 돌아가는 나의 비행기 표를 1등석으로 예약해 줬다. 자부심과 함께 오랜만에 해방감에 젖은 나는 귀국길에 그 동안 들러보지 못했던 미국 주요 도시를 살펴보고 싶었다. 그러나 돈이 없었던 나는 궁여지책으로 1등석 비행기표를 이코노미 좌석으로 바꾸고 남은 돈으로 미국 여행길에 나섰다.

뉴욕과 워싱턴을 거쳐 샌프란시스코에서 토쿄를 경유, 서울로 들어가는 스케줄이었다. 백악관은 물론 말로만 듣던 맨해튼의 5번가를 처음 볼 수 있었고, 엠파이어 스테이트 건물에도 올라가 보았다.

1959년 12월 30일 나는 한국 땅을 밟았고, 여의도 공항에 내린 나는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다. 미국 박사학위를 받은 나의 귀국은 동아일보와 연합신문 등 국내 언론에도 보도되었을 정도였다. 말 그대로 금의환향인 셈이었다.

▲ 1959년 12월 여의도공항에서 가족과 함께 찍은 기념사진 / 가운데 꽃다발을 두른 이가 나다

나는 서울대의대 미생물학교실의 조교로 복귀한 뒤 1년 반 후인 1961년 봄 전임강사 발령을 받았다. 자신감으로 사기충천한 나는 실습시간에 당시로선 파격적인 제도를 도입했다. 영어로 된 미네소타의대 미생물학 실습 교과서를 그대로 도입해 학생 실습교재로 사용했다. 실습교재를 영어가 빽빽이 적힌 원문으로 바꾼 것이다

실습시험도 단순한 균 배양이 아니라 미지의 균주를 학생에게 준 뒤 알아맞히는 새로운 방식을 도입했다. 출석도 매시간 체크해 강의를 듣지 않는 학생에겐 사정없이 감점을 줬고, 자신이 사용한 실험도구는 자신이 정리하고 가도록 가르쳤다. 적당히 배우는 데 익숙했던 당시의 의과대학생에게 난데없이 엄격한 미국식 신교육이 실시된 것이다.

어느새 내 이름을 바꾸어 부르는 이호랑 선생이란 별명이 학생들에게 유행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자신만만하게 잔뜩 일을 벌이던 나는 곧 이곳이 한국 땅임을 절감하게 되었다. 지금도 우리 사회의 병폐로 지적되고 있는 교수들의 인맥 만들기 소용돌이에 휘말려야 했기 때문이다.

당시 서울대의대 미생물학교실의 주임교수는 기용숙 박사지만 서울대의대 교무과장이자 교실 내 서열 2위인 박진영 교수도 파워가 만만치 않았다. 같은 서울대 교수지만 기 교수는 경의전 출신이고 박 교수는 경성제대 출신이라 두 사람 사이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갈등이 있었다.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따고 돌아온 나는 자연 이들의 스카웃 대상이 되었다. 박 교수는 자신의 방을 당시 조교에 불과했던 나에게 물려주는 파격적인 대우를 했으며, 자신의 집 옆에 우리 집을 구해 줘 출퇴근을 같이 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다. 주임교수였던 기 교수는 자연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당시 서울대의대는 자연스레 경성제대 출신이 장악하고 있었다. 어느 날 다른 교실의 K교수가 나를 대학로에 있는 학림다방으로 불러냈다. 역시 경성제대 출신이며 박 교수의 직속 후배인 K교수는 나에게 박 교수의 라인에 서도록 권유했다. 그러나 두 분 다 존경하는 스승인지라 나로선 어느 한쪽에 선다는 것이 부담스럽기 짝이 없었다.

1964년, 존경하고 정이 든 박 교수가 갑자기 간암으로 타계하면서 나의 마음고생은 사라졌다. 박 교수가 살아 계셨다면 그의 후광을 업고 학생과장, 교무과장 등 중요한 보직을 거쳐 학장에 이르는 출세가도를 달렸을지도 모른다. 물론 고려대의대로 자리를 옮길 수도 없었을 것이다. 더욱이 내가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한탄바이러스의 발견이 가능했을까 하는 의문을 갖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