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의학박사가 하도 많이 쏟아져 공급과잉 상태지만 1960년대만 해도 매우 드물어 희소가치와 권위가 있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 돈을 많이 번 개업 의사들이 명예욕이 생기고 환자를 끌기 위한 수단으로 박사학위를 따려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의학박사 간판을 내걸면 환자들이 대단한 의사로 생각해 몰려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개업 의사들이 의대 교수 아래 학위를 받기 위한 연구생으로 대학원 박사과정에 들어와 매달 연구비를 내고 학위를 받는 악습이 생겨났다. 부교수 이상 교수는 박사과정 연구생을 둘 수 있었는데 박사논문 한편을 만드는 데 보통 4백만 원 가까운 연구비를 교수에게 내야 했다.
당시 전임강사의 월급이 7~8만 원이었으므로 이는 매우 큰 금액이었다. 박사학위 연구생은 돈만 내고 연구는 조교들이 전적으로 맡아 한 후 그들 이름으로 논문을 만들어 주는 식이었다. 말 그대로 돈박사인 셈이다. 심지어 연구생이 낸 연구비로 땅을 사 부자가 된 교수도 있다고 한다. 나를 비롯해 미국 미네소타대학에 유학한 우리 조교들은 이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결국 우리는 조교 강사회란 모임을 결성해 이를 반대하기로 결정했다. 위원장은 나의 동료인 생리학의 이상돈이었고 나는 부위원장을 맡았다. 우리는 돈을 내고 학위를 받는 연구생 제도를 없애고 연구생은 본인이 직접 실험실에 와서 연구를 해야 한다는 내용의 결의문을 작성했다.
그러나 고양이 목에 누가 방울을 달 것인가. 이상돈은 차마 자신이 이를 학장에게 제출하지 못하겠다고 발뺌을 했다. 결국 부위원장인 내가 겁 없이 나섰다.
그때 서울대의대 학장은 내가 좋아하는 해부학의 나세진 교수였다. 나 교수는 거구인데다 머리도 짧게 깎고 다녀 인상이 우락부락했을 뿐 아니라 성격도 다혈질이라 누구나 무서워했다.
주먹도 다른 사람의 두 배는 족히 돼 한 번은 버릇없는 운전기사의 뺨을 한 대 쳤는데 고막이 터질 정도로 위력이 있었다.그러나 나 교수는 미국 유학시절부터 나를 좋게 보았고, 나 또한 평소 존경하는 스승인지라 용기를 내어 결의문을 들고 학장실을 찾았다. 옳은 일이고 할 말은 해야겠다는 생각에서였다.
반응은 생각보다 빨리 왔다. 나 교수는 결의문을 다 읽기도 전에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지면서 “어떤 놈이 이 따위 짓을 한 거야”라는 불호령이 떨어졌다. 순간 나의 귀를 붙잡고 좌우로 흔들어 댔는데 어찌나 아프던지 귀가 떨어져 나가는 줄 알았다.
나는 더 이상 말도 못하고 쫓겨났다. 그 후 한 달 이상 귀가 아파 고생했던 기억이 남아 있다. 순진했던 우리 조교들의 반발은 결국 이렇게 무산되고 말았다.
원로 교수들의 라인 만들기와 돈박사 제도로 의과대학이 멍들고 있을 때 내게 결정타를 가한 것은 군 입대 통지서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