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에 돌아온 내게 가장 아쉬운 것은 연구를 위한 연구비였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지 않은가. 연구하고 싶은 것은 많았지만 돈이 없었다. 연구에 필수적인 원심분리기나 세균 배양용 배지(培地)도 모두 돈이 있어야 장만할 수 있는 일이 아닌가.
하긴 당시 우리나라는 정부의 1년 예산이 보잉사의 점보비행기 몇 대 값도 채 안 되는 실정이었다. 당장 먹고 살기에 급급한 시절이었으므로 국립대학인 서울대라 할지라도 정부의 연구비가 있을 리 만무했다. 그렇다고 마냥 주저앉아 허송세월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나는 미국국립보건원(NIH)에 연구비를 신청하기로 결심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미국국립보건원은 국내 학자와 외국 학자에게 연구비를 지원하는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신청서에 훌륭한 연구 계획을 잘 써 내면 거액의 연구비를 받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외국 학자에게 주는 연구비는 소액으로 한정되어 있고 지원자가 많아 경쟁이 심해 연구비 받기는 하늘의 별 따기였다.
나는 필사의 심정으로 심사위원들을 감동시킬 수 있는 일본뇌염바이러스의 월동기전에 대한 연구비 신청서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1973년 8월까지 무려 6개월이 걸렸다. 창의성 있는 연구내용과 문구 하나 하나까지 심혈을 기울였다.
1년이 지난 1964년 9월 나는 드디어 그들로부터 연구비를 지원하겠다는 통지를 받을 수 있었다. 당시 미국국립보건원이 다른 나라의 학자에게 지원한 연구 과제는 10개에 불과했으며, 일본 학자도 여기에 끼지 못했을 정도였으니 연구 환경이 엉망인 나로서는 기적이라 할 수 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지도교수인 쉬러 교수가 일본뇌염의 대가로 미국국립보건원의 연구비 심사위원이었다는 점도 큰 힘이 되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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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2년 강사 시절 처와 함께 찍은 기념사진 / 가운데는 돌을 맞이한 큰아들 성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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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신청한 연구 제목은 한국에서의 일본뇌염 바이러스의 월동기전이었다. 여름철 바이러스를 가진 뇌염모기가 유행했다가 겨울이 되면 모든 모기가 사라지는데 다음해 여름이 되면 영락없이 뇌염바이러스를 가진 모기가 다시 나타나는 이유를 그때까지 몰랐던 것이다.
미국의 연구비는 1964년부터 1969년까지 5년간 6만 달러에 달했고, 야외실험용 차량 구입비도 있었다. 특히 1964년 첫해엔 1만6천 달러가 지원됐다. 당시로선 우리나라 경제 사정에 비하면 파격적인 액수였다.
한국에서 미국국립보건원의 연구비를 받은 학자는 내가 처음이었다. 한번은 선배교수였던 명주완 학장이 단성사에서 상영하는 영화 구경을 갔는데 영화 시작 전에 하는 대한뉴스에서 내가 미국국립보건원 연구비를 탔다는 뉴스 영화를 보고 나를 찾아와 혀를 끌끌 찼다.
내용인즉 이 뉴스를 본 사람 중에서 기가 막히게 좋은 혼사가 들어왔는데 내가 이미 장가를 가 아쉽게 됐다는 것이다. 만약 장가를 더 늦게 갔더라면 내가 어떻게 됐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첫해 지급된 1만6천 달러의 연구비엔 지프의 일종인 랜드로버 구입비로 3천 달러가 포함되어 있었다. 뇌염모기 연구엔 현장을 뛰어다니며 각종 모기와 박쥐와 같은 여러 가지 동물들을 채집해야 하므로 네 바퀴가 도는 연구용 차량이 필수적이기 때문이었다. 문제는 처음부터 여기에서 비롯됐다.
1965년 12월 인천항에 랜드로버가 들어와 수입 서류를 가지고 이를 찾으러 간 나에게 세관 직원이 코웃음을 쳤다. 지금이야 외제차가 흔하지만 당시엔 랜드로버 같은 외제 차량은 재벌 회장이나 탈 수 있었기 때문이다. 랜드로버를 찾아가려면 3백%의 고율 관세를 내야 한다는 것이 아닌가.
무려 9천 달러나 되는 거금을 내가 무슨 수로 마련하겠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