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염 연구용 차량 (제14화)

1주일 후 문교부장관의 허가서를 갖고 인천 세관을 다시 찾았지만 이번엔 재무부장관의 허락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 아닌가. 문교부장관이야 내가 서울대 교수였으므로 쉽게 허락을 받을 수 있었지만 재무부장관 허락은 어떻게 얻어야 할지 난감했다.

나는 그때 서울대 총장인 신태환 박사를 찾아갔다. 미국 연구비와 자동차는 서울대학교 총장 앞으로 왔기 때문이다. 신 박사는 총장이 되기 전 건설부장관도 역임했던 터라 관계(官界)에 지인이 많으리란 기대 때문이었다.

나를 면담한 신 박사는 흔쾌히 도와주겠다고 말했다. 그 자리에서 재무부장관에게 전화를 걸어 허락을 받아 냈다. 이번엔 되겠거니 하고 재무부장관이 도장이 찍힌 허가서를 들고 인천 세관을 찾은 나는 또다시 거절당했다. 세관 직원 말씀인즉, 상공부장관의 허가서도 필요하다는 것이 아닌가.

기가 찰 노릇이었다. 호화사치를 위한 것도 아니고 우리 정부 돈을 축낸 것도 아니며 미국 정부가 서울대학 교수에게 연구 목적의 차량 한 대를 보낸 것인데, 무슨 절차가 이렇게 복잡하고 까다롭단 말인가. 주는 것도 받지 못하게 하는 처사 같았다. 인천항에 차가 도착한 지 이미 3개월이 지났다. 그러나 포기할 수는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신 총장의 도움을 한 번 더 청했다. 신 박사는 내게 상공부차관을 연결시켜 주었다. 당시 상공부차관은 훗날 박정희 대통령의 임기 후반 비서실장을 지낸 김정렴 씨였다. 나는 상공부에 직접 서류를 들고 갔으며 김정렴 씨의 후대에 고마움을 간직하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관세 담당 과장이었다. 그는 나 보고 “당신 말야. 국가를 내세우고 또 서울대 교수면 다야! 그렇게 해도 되느냐”며 노골적으로 불쾌함을 드러냈다. 윗선에서 찍어 누른 격이라 몹시 기분이 상한 모양이었다. 나로선 어처구니없었지만 이러다 싸움만 하게 생겼다 싶어 자세를 낮추고 달래 가며 겨우 1주일이 걸려서 허가서를 얻어 냈다.

이렇게 해서 미국 정부에서 보낸 랜드로버를 인천항에 도착한지 5개월 만에야 겨우 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랜드로버를 둘러싼 잡음은 이후에도 계속 터져 나왔다.

▲ 동두천 지역에서 조교왐 함께 / 이 차는 미군 사령부가 제공한 유행성출열열 연구차량이다. 미군 차량 번호여서 일선 지역을 무사 통과 하는 잇점이 있는 차였다.

젊은 조교수가 랜드로버를 타고 출퇴근을 하니 다른 교수들이 곱게 볼 리 만무했다. 교내 마당에 주차할 때도 차량 소리와 라디오 소리가 시끄럽다며 다른 곳으로 옮기도록 면박을 당하기 일쑤였다. 심지어 “네가 똑똑해서가 아니라 서울대 교수니까 미국에서 연구비를 주었고 랜드로버를 탈 수 있게 된 것이 아니냐”란 소릴 듣기까지 했다. 일견 맞는 말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따라서 나는 가능하면 랜드로버를 다른 교수들이 이용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외국에서 손님이 오거나 교수가 이사를 할 때 빌려 주곤 했던 것이다. 한번은 모 교수가 이사할 때 차를 빌려 준 적이 있다. 그런데 뒷문 차창을 열고 그 위에 짐을 가득 실은 것이 교통경찰에게 적발돼 딱지를 떼고 벌금을 물게 됐다. 그랬는데 그 교수 말씀, “네 차이고 네가 연구비가 많으니 벌금은 내 대신 네가 내라”는 것이 아닌가. 수만 달러의 연구비를 받았는데 그중 절반은 네가 얼렁뚱땅 해먹어도 되는 돈이란 논리였다. 기가 차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차는 굴려야 했기 때문에 내가 벌금을 낼 수밖에 없었다.

당시엔 장관도 랜드로버 같은 고급 차량을(사실은 고급차량이 아니며 야외용 차량) 이용하지 못하고 미군 지프를 개조한 차량을 타던 때였다. 그래서인지 시샘도 많았다. 한번은 내가 랜드로버에 백인 여성을 태우고 다니며 바람을 피운다는 헛소문이 나기도 했다. 알고 봤더니 내 차와 똑같은 랜드로버를 이용하던 외국인의 것으로 판명됐다.

이렇게 탈도 많았던 랜드로버를 5년간 시골길에서 사용하다 보니 헌 차가 되었고 결국 친구에게 넘기기로 했다. 당시 나는 답십리에 살고 있어서 동대문구청이 담당 관청이었다. 소유권 이전을 위해 동대문구청을 찾은 나는 깜짝 놀랐다. 매년 자동차세를 꼬박꼬박 냈는데 랜드로버의 차적(車籍)조차 없는 것이 아닌가.

알고 봤더니 담당 세무직원이 내가 낸 자동차세를 5년간이나 떼먹었던 것이다. 나는 화가 치밀어 동회사무소로 전출한 담당 직원을 찾아 따졌더니 죄송하다며 싹싹 비는 것이었다. 어쩔 수 없이 그냥 지나가고 말았지만 지금 생각해도 1960년대 말 한국 사회는 너무나 못사는 사람이 많았고 모든 제도가 허술하기 짝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