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1년 서울대의대 전신인 경성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한 기용숙 교수는 기이한 경력의 쇼유자이기도 하다. 졸업 후 대구 동산병원에서 소아과 의사를 하다가 일본군이 운영하던 만주 대련시 소재 만주철도주식회사 위생연구소 연구원으로 추천되어 직장을 옮겼다. 그곳은 이름만 미생물연구소지 실제는 발진티푸스와 페스트균을 연구하는 세균연구소였으며, 세균전 연구로 악명 높은 일본군 731부대의 분소였다.
기 교수는 처음에는 그곳이 예방백신을 개발하는 곳인 줄 알고 발진티푸스 연구에 매달렸으나, 아중에서야 자신의 연구가 세균전을 위한 기초연구로 활용되고 있다는 의심이 들었다고 했다.
게다가 그는 그곳에서 유일한 의사였기에, 1943년경부터는 세균전의 기밀누설을 우려한 일본 헌병의 감시와 눈초리가 더욱 따가워지는 것을 느꼈다고 했다.
다행이 일본이 패망하기 1년 전인 1944년 동경제국대학 교수 출신이며, 문관이었던 연구소 소장이 그를 좋게 보아 한국으로 나올 수 있었는데 이로써 제2의 세계개전 후 일본군 세균전의 전범으로 몰릴 위기에서도 벗어날 수 있었다.
그는 귀국 후 대구 동산병원 소아과에 근무하면서 대구의전에서 미생물학 강의를 하였으며, 해방 후에는 지금의 서울 삼청동 공무원 교육원 자리에 있던 국립방역연구소 소장으로 근무하다 1949년 경성대학 의학부와 경성의학전문학교가 서울대의대로 통합되면서 서울의대 미생물학 교수로 자리를 잡았다.
당시만 해도 한국은 빈곤하여 각종 전염병이 우글거리는 곳이었다. 천연두는 물론 일본뇌염, 재귀열, 발진티푸스, 말라리아 등 각종 전염병으로 병원마다 환자들이 들끓었다. 나는 학생 때 환자를 진료하는 내과의사가 되고 싶었으나 먼저 미생물학을 공부해야 훌륭한 내과의사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1953년 12월에 서울대학교 대학원 미생물학과에 입학하고 1954년 3월 졸업하자마자 육군에 입대하여 3개월간의 군의관 훈련을 마산에 있는 육군군의학교에서 마치고 기초과학 교수요원으로 기용숙 교수가 있는 미생물학교실의 조교로 임명받았다.
안타까운 것은 당시 점심도 굶어가면서 공부만 한 탓에 기억에 남을 만한 학창시절의 즐거운 추억이나 로맨스가 전무하다는 사실이다. 아마 6‧25라는 비극 속에 살아남은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였으리라 생각된다. 그땐 우리 모두가 다같이 못살고 헐벗은 시절이었기 때문에 당장 입에 풀칠하는 것이 문제였다. 나는 그래도 육군 6사단에서 헌병대위로 근무하던 형님이 학비를 대주었기 때문에 큰 걱정은 없었지만 매일 점심을 굶어야 했을 정도로 궁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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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5년 조교시절 교실원들의 야유회 모습 / 왼쪽은 고 박진영 교수, 가운데가 필자, 오른쪽은 1년 후배인 배직현 서울 아산병원 임상병리학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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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대 조교시절 내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학생실습에 사용할 세균이 자랄 수 있는 배지를 만드는 일이었다. 그것은 쇠고기를 칼로 다지고 긇여 우려낸 국물에 펩톤과 한천을 섞어 만든다. 중요한 것은 공기 중에 있는 다른 잡균이 들어가지 못하도록 철저하게 멸균해야 한다는 것이다. 기 교수는 항상 낮에는 밖에 나갔다가 저녁 6시쯤 실험실에 나타나 조교들에게 내일 아침 사용할 배지를 만들라고 지시하곤 했다. 그러니까 기 교수가 오후에 나타나는 날이면 우리들은 그날 실험실에서 꼬박 밤을 지새워야만 했다. 요즘처럼 시약 제조회사에서 미리 만들어진 좋은 배지가 없던 시절이므로 우리는 배지를 직접 만들어 미군이 쓰다 남은 야전용 멸균 장비로 직접 멸균해야 했다. 마치 대장간의 풀무처럼 생긴 장비로 바람개비를 둘려가며 쇠고기 국물과 한천 혼합물에 121도 온도와 12파운드의 압력으로 15분간 정확하게 유지해야 비로소 완전하게 멸균이 된다.
나는 원칙주의자였으므로 밤새도록 그 일에 매달렸다. 그러나 1년 선배 조교였던 정 모씨가 밤에 데이트를 하느라 적당히 일을 끝내고 일찍 퇴근한 적이 있었다. 다음 날 아침 기 교수가 나타나 플라스크에 담긴 배지를 가지고 오라고 말했다. 내 것은 멸균하였기에 맑고 투명한 배지였다. 그러나 정 선배의 것은 멸균하지 않았기 때문에 잡균이 증식하여 뿌옇게 흐려져 있었다. 기 교수는 정 선배에게 규칙대로 멸균을 했느냐고 따져 물었다. 정 선배는 엉겁결에 재대로 하긴 했으나 결과가 이렇게 나왔다고 둘러댔다. 기 교수는 같은 자리에서 세 번을 반복해서 물러 보았다. 그러나 이미 내뱉은 말이니 만큼 정 선배도 물러 설 수 없어 여러 가지 핑계를 댔다. 결국 기 교수의 불벼락이 떨어졌다.
“연구하는 학자의 생명은 정직인데 끝까지 나를 속이려고 드니 용서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결국 정 선배는 배겨나지 못하고 미생물학교실에서 떠나고 말았다. 그후그는 외과전문의가 되어 현재 미국에서 잘 살고 있다.
지금도 가끔 표절이니 가짜 논문이니 해서 학자의 연구결과에 대한 조작 등의 시비가 있는데 학자의 세계에서는 부끄럽기 짝이 없는 일이다.
그러나 학문에 있어서 거짓은 언제고 탄로 나고야 만다. 학문의 길을 걷기 시작한 나에게 유난히 정직을 강조하던 기 교수의 꼬장꼬장 함은 두고두고 큰 교훈이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