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염환자 없어지다 (제18화)

일본에서 개발된 뇌염백신이 국내에 들어오면서 해마다 수천 명씩 발생하던 뇌염환자가 급격히 줄기 시작했다. 자연히 내 연구도 힘이 빠졌고 연구비를 지원하던 미국국립보건원도 추가 연구를 중단하기로 방침을 정했다.

산이 좋아 산에 오른다고 할까. 돈벌이 등 실용적 관점에서 벗어나 순전히 지적 호기심에서 연구할 수 있었던 낭만적 분위기는 이미 기대하기 어려웠다. 현재 한국에서 뇌염은 수년에 한두 명 발생할 정도로 잊혀 진 질환이 되고 말았다.

여기서 한 가지 언급할 일은 뇌염이 한국이나 일본에서 뿌리 뽑힌 이유는 뇌염백신이 보급된 탓도 있지만 농사법의 개량과 돼지에 예방백신을 접종한 것이 한몫 했다는 사실이다. 아직도 뇌염모기가 물이 고인 웅덩이에서 생기는 것으로 잘못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뇌염모기는 언제나 여름철 논물에서 알을 까고 새끼가 부화된다.

보기와 달리 뇌염모기는 웅덩이 등 더러운 물에선 알을 까지 않는 까다로운 곤충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농약이 보급되면서 논물의 모기 서식환경이 악화되고 벼가 무르익는 8월부터는 논물을 논에서 빼내는 새로운 농경법이 1960년대 후반부터 확산되면서 뇌염모기의 번식지가 줄었다. 또 뇌염바이러스의 증폭동물인 돼지는 뇌염에 감염되면 임신한 돼지가 유산을 하기 때문에 돼지 사육사들이 이를 막기 위해 매년 봄 예방백신을 주사하고 있다. 이는 결과적으로 모기에 의한 바이러스의 확산을 차단했던 것이다. 자연히 뇌염환자 수도 내리막길을 걷게 되었다.

나의 첫 연구 사업인 일본뇌염은 이렇게 중도 하차했지만 학자로서 토양을 다지는 데는 많은 기여를 했다. 무엇보다 기억에 남는 것은 세계 유수의 뇌염연구기관을 방문한 것이다. 내가 개인적으로 미국을 위대한 나라라고 평가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미국국립보건원이 내게 지원한 연구비 중엔 해외연구소 시찰 비용이 포함돼 있었다. 연구의 방향을 제대로 잡기 위해선 우선 학자로서 새로운 기술과 견문을 넓히는 일이 필수적이라고 보고 해외 시찰을 먼저 시킨 것이다.

▲ 1980년 대한민국학술원상 시상식에서 / 왼쪽이 고 나세진 학장, 중앙이 필자부부, 오른쪽이 천경자 예술원 회원

1967년 나는 한 달에 걸쳐 일본, 미국, 영국, 프랑스, 태국, 대만의 뇌염연구기관을 순방하는 해외여행의 특권을 누리게 된다.

해외 시찰에서 가장 먼저 느낀 것은 내가 우물 안 개구리였다는 사실이다. 가장 먼저 들른 미국 캘리포니아 대학 뇌염연구소만 하더라도 1년 예산이 70만 달러로 이는 당시 서울대의대 1년 예산의 3배가 넘는 돈이었다.

한 번은 미국 유타대 미생물학교실 게브하르트 교수의 집을 방문했는데 교수가 대화 도중 전화를 받더니 갑자기 환성을 지르는 것이 아닌가. 알고 봤더니 자신이 쓴 논문이 저명한 의학잡지 「뉴 잉글랜드」 학지에 게재됐는데 이를 보고 한 독지가가 10만 달러란 연구비를 쾌척했다는 것이다. 연구비를 국가기관이 아닌 민간인이 개인적으로 지원한다는 사실 자체가 생소했던 내겐 부럽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론 그러한 분위기가 미국에 정착된 것도 따지고 보면 연구자들이 그만큼 사회에 헌신하고 기여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워싱턴의 월터리드 미국육군병원에 들렀을 때 느꼈던 일이다. 왜 이름이 월터리드인가 했더니, 월터리드는 19세기 말 파나마 운하를 완공시킨 미국육군공병대 소속의 군의관 대위의 이름이란 것이다. 태평양과 대서양을 연결하는 파나마 운하는 원래 수에즈 운하 공사를 시작한 프랑스의 저명한 토목공학자 레셉스가 시작했다가 실패했는데 결정적 이유가 열대지역의 대표적 풍토병인 황열병 때문이었다. 수많은 인부들이 황열병에 걸려 사망했던 것이다.

프랑스가 실패한 파나마 운하 공사를 미국육군공병대가 성공한 것은, 월터리드 대위가 황열병이 모기로 인해 전염된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규명했기 때문이었다. 이후 인부들을 모기에 물리지 않게 함으로써 무사히 파나마 운하란 대역사를 완성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월터리드 대위는 연구 도중 황열병에 걸려 현지에서 사망했다. 세계 최고의 연구소와 군병원으로 손꼽히는 월터리드 미국육군병원과 연구소의 이름은 이렇게 탄생한 것이다. 한국 사람들은 훌륭한 연구 업적을 이룩한 자기 나라 학자들의 이름을 기리는 데 인색하기 짝이 없는데 이는 후손들의 희망을 꺾는 일이며, 국가 발전에도 도움이 되지 않으므로 이런 풍토를 개선하는 노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