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연구 주제를 찾는 데 골몰하던 나는 월터리드 미국육군연구소를 방문했을 때 그곳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었다. 당시 월터리드 미국육군연구소의 바이러스연구부장에는 부셔 대령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나의 미네소타대학 유학시절 나의 지도교수였던 쉬러 교수 밑에서 나에 이어 두 번째로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이었다. 따지고 보면 나의 대학원 후배였던 셈이다. 학문의 세계에서도 인간관계 특히 선후배관계는 역시 중요했다.
그는 나를 유달리 친절하게 대해 주었다. 고민하고 있던 내게 왜 한국에서 유행성출혈열(出血熱)에 대한 연구를 하지 않느냐고 반문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일본 토쿄(東京) 시 근교에 있는 미국육군연구개발부 극동사령지부에 연구비를 신청해 보라는 귀띔도 해주고 주소도 알려 주었다.
유행성출혈열은 1960년대만 하더라도 소련, 만주와 한국에서 유행하던 무서운 괴질이었다. 1930년대 말 소련군에서 수천 명, 그리고 1940년 전후에는 만주에 주둔한 일본제국 육군관동군 100만 명 중 1만2천여 명의 환자가 발생해 2천여 명이 사망했으며, 한국에서는 처음으로 6·25전쟁 당시 유엔군에서 3천2백여 명의 환자가 발생해 수백 명이 사망했으나 원인불명이었다.
6·25 때 유엔군사령관의 통역관이었고 현 학술원회원이며 영문학자인 조성식 박사의 회고에 따르면 당시 전투중 미군에서 발생한 부상자 수보다 괴질에 걸린 환자 수가 더 많아 유엔군의 사기가 땅에 떨어지고 연일 대책회의가 사령관실에서 열렸다고 한다. 고열과 함께 심한 복통이 생기고 얼굴과 목, 그리고 눈의 혈관이 터져 심한 출혈반점이 나타나고 신장이 파괴되어 오줌이 나오는 이 괴질은 당시 사망률이 10%를 웃도는 치명적인 질환이었다.
오죽하면 6·25때 미군은 이 괴질에 ‘한국형출혈열’이란 유쾌하지 못한 병명을 붙였겠는가. 당시 이북에 있던 인민군과 중공군에서도 수천 명의 환자가 생겨 이 괴질은 미군이 뿌린 세균 때문에 발생한 세균전이란 비난을 퍼붓기도 했다. 그때부터 숱하게 많은 미국 학자들이 이 괴질의 원인을 밝혀내려고 매달렸으나 병원체를 찾아내지 못한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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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행성출혈열 연구비는 미국육군성에 받았다 / 1977년 미국육군의학 연구 및 전염병dsurnth에서 유행성출혈열 연구 책임자인 후렌치 중령(오른쪽)과 함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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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한국에서 유행하는 괴질인데다가 병명조차 한국형출혈열이니 한국인 학자가 한국에서 연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부셔 대령의 충고를 받아들여 연구 주제를 일본뇌염에서 유행성출혈열로 바꾸고, 1969년 8월 병원체 규명을 위한 연구 계획서를 작성해 일본에 있는 미국육군연구개발부 극동사령부에 제출했다.
결과는 의외로 신속했다. 5개월 만인 다음 해 1월 연구비를 지원하겠다는 반가운 통보를 받았다. 1970년 1월부터 1973년 1월까지 3년간 4만 달러의 연구비가 책정됐다. 그리고 미국육군용 지프차량 한 대가 딸려 나왔다. 문제는 일본뇌염과 달리 유행성출혈열은 삼팔선 부근 비무장지대 근처에서 많이 발생하는 질환이므로 군인 주둔지역을 자주 왔다 갔다 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군사작전 지역에는 연구용이라 하더라도 민간차량의 통행은 자유롭지 못하다.
결국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판다는 격으로 차량 통행에 전혀 지장을 받지 않는 미군 번호가 달린 차량이 공급되었다. 연구개발부 사령관인 월튼 대령은 기한이 지나 폐기처분 일보 직전에 있는 차량을 얻기 위해 담당자인 미국육군상사에게 위스키 한 병을 들고 가 여차저차한 이유로 미군 번호판이 달린 차량이 절대로 필요하다고 부탁했다. 위스키란 꼼수가 통했는지 그는 의외로 흔쾌히 군용 지프차 한 대를 나에게 내주었다.
연구비도 따냈고 차량도 구했으니 이젠 본격적으로 연구에 몰두하는 일만 남았다. 나는 일본뇌염 연구를 시작하던 때와 마찬가지로 출혈열 연구를 시작하기 전 많은 지식과 새로운 기술을 습득하기 위해 유행성출혈열과 비슷한 질병인 볼리비아출혈열 연구의 현장을 직접 방문하기로 하고 1971년 4월 파나마로 떠났다.
파나마에 있는 미국중미의학연구소의 존슨 소장은 1966년 남미 볼리비아에서 유행하던 괴질인 볼리비아출혈열의 원인 바이러스를 진드기로부터 세계 최초로 발견한 출혈열 연구 분야의 최고 권위자였다. 오산의 미국공군비행장에서 미국 군용기를 타고 떠났는데 지금도 그때 생각만 하면 우쭐해진다.
내게 미국육군에서 GS15란 계급을 부여했는데 이는 당시 대령급 대우였다. 1등석 자리가 예약됐음은 물론이고 미국공군상사가 비행장에서 나를 직접 영접하고 세관수속도 대신 해주고 짐 검사도 받지 않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