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한 인체실험 (제20화)

파나마 미군기지에 도착한 나는 기지 내에 있는 미국중미의학연구소를 찾아가 소장인 존슨 박사를 다음날 아침에 만났다. 나는 그에게서 볼리비아출혈열의 전파경로와 관련해 재미있는 사실을 들었다. 이 병이 진드기뿐만 아니라 환자의 키스를 통해서도 옮겨질 수 있음이 인체실험을 통해 증명됐는데 실험대상자가 바로 자신과 그의 부인이라지 않은가.

예로부터 전염병은 누구에게나 공포의 대상이어서 역사를 통해 고찰하면 항상 연구자와 그 가족들이 자의 반 타의 반 실험 대상이 되곤 했다. 종두법의 창시자인 제너 박사만 하더라도 자신과 자신의 아들의 팔에 먼저 우두에 걸린 소의 고름을 바르는 솔선수범을 보였으며, 1915년 미국공중위생국의 골드버거 박사는 전염병인 줄 알았던 펠라그라(니코틴산 결핍증)가 비타민 결핍증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환자의 대소변 샘플을 자신과 가족에게 직접 먹이기도 했다지 않은가. 우리나라에서도 1879년 지석영 선생이 의제에게 처음으로 우두를 접종하였다.

존슨 박사의 인체 실험은 순전히 우연이었다. 유행지역에서 진드기 채집을 하던 그가 볼리비아출혈열에 걸려 파나마의 연구소병원에 입원했는데 마침 담당의사가 나중에 그의 부인이 된 웹 박사였다는 것이다. 진료 도중 사랑에 빠진 이들이 서로 키스를 나눴는데 10일 후 웹 박사가 볼리비아출혈열에 걸림으로써 의학교과서에 볼리비아출혈열의 전염 경로에는 인간의 키스도 포함되게 되었다.

나는 이런 에피소드를 들으면서 1주일간에 걸쳐 그에게서 진드기 조직을 쥐에 접종해 바이러스를 분리해 내는 기법을 배울 수 있었다. 귀국길에 파나마를 떠나 뉴욕을 방문하였는데 미네소타대학 유학시절 나의 지도교수였던 쉬러 교수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박사과정 시절 그가 매우 깐깐하고 까다로운 사람이라 느꼈는데 아니나 다를까 내가 떠난 후 미네소타대학 미생물학교실 교수들 간의 권력다툼에서 밀려나 뉴욕 시내에 있는 코넬대의과대학 미생물학 주임교수로 옮겨 와 있었다. 오히려 더 좋은 대학에 왔으니 잘된 셈이었다.

▲ 교실원과 함께 찍은 사진 (19991. 4.2.) / 이 중에는 실험 중 유행성 출혈열에 걸린 사람도 있다

우리 같으면 자신의 박사 1호생이 태평양을 건너 오랜만에 은사를 방문했는데 얼마나 환대를 했겠는가. 나는 사전에 방문 날짜를 약속하고 그를 찾아갔다. 그러나 그는 바쁘다고 그의 사무실에서 두 시간이나 나를 기다리게 하더니 만난 지 1시간도 안 돼 바쁜 일이 있다고 자리를 뜨는 냉정함을 보였다. 게다가 여행 중이라 단벌 양복에 땀과 때가 잔뜩 묻은 와이셔츠 깃 차림의 내가 못내 마음에 안 드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그러한 그도 훗날 내가 유행성출혈열의 원인 바이러스를 세계 최초로 발견하는 업적을 만들어 내고 뉴욕을 방문했을 때는 태도가 돌변해 자신의 집의 초대하고 가족과 함께 영화관에 가서 영화를 보여 주는 환대를 베풀었다. 그래서 사람은 일단 성공하고 봐야 한다는 말이 나오게 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이때 무섭도록 이해타산적인 미국인의 면모를 물씬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내가 만난 많은 서양 사람이 모두 이처럼 까다로운 사람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1980년 초 호주에서 열린 국제학회에 참석했을 때의 일이다. 뮤레이밸리 뇌염이란 호주의 토착질환을 관찰하기 위해 나를 포함한 서너 명의 외국학자들이 수도인 캔버라 시 인근 지역을 방문하게 되었다. 차로 몇 시간을 달려오느라 피곤해 차에서 졸고 있는 나를 옆자리에 앉았던 미국인 교수가 깨우는 것이 아닌가.

웬일인가 싶었더니 자신의 팔뚝에 살며시 앉아 마음껏 피를 빨고 있는 자그마한 모기 한 마리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것이었다. 이때 처음으로 모기가 사람의 피를 빠는 장면을 눈앞에서 자세히 볼 수 있었는데, 어찌나 생생하던지 모기의 배가 순식간에 빨갛게 볼록해지는 것을 보았다. 그러면서 그는 “Today is her Christmas day(오늘은 모기의 크리스마스)”라는 농담과 함께 실컷 피를 빨아먹은 모기를 창밖으로 날려 보내는 것이 아닌가.

순간 별난 사람 다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한편으론 우리 같으면 모기를 보면 반사적으로 모기를 손바닥으로 내리쳐서 죽였을 텐데 하는 생각과 함께 새삼 그네들의 여유로운 마음이 부러워졌다. 나도 미국에서 흔히 미국사람들이 사라져 가는 야생동물이나 곤충을 보호하는 것을 볼 수 있었으며, 또 애들에게도 그렇게 가르치는 것을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