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나마와 미국의 여러 연구소를 방문해 출혈열 관련 첨단지식과 기술을 습득하고 미국 군용기 편으로 서울로 돌아온 나는 유행성출혈열의 정체를 밝혀내기 위해 본격적으로 연구에 몰입했다. 그러나 예상했던 대로 출혈열 연구는 쉽지 않았다. 처음 연구를 시작한 1970년부터 세계 최초로 바이러스 발견에 성공한 1975년까지 6년이란 적지 않은 세월 동안 수십 가지의 크고 작은 실패와 좌절을 경험해야 했다. 오죽하면 미국의 세계적인 바이러스학자들도 한국전쟁 이후 20년간 유행성출혈열 연구에 매달렸지만 모조리 실패했을까 싶었다.
그러나 고난의, 연속이었던 나의 출혈열 연구가 지속될 수 있었던 것은 미군의 꾸준한 연구비 지원 덕분이었다.
입장을 바꿔 놓고 생각하면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당시 후진국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던 한국의 이름 모를 학자에게 세계 최강의 국가인 미국이 수만 달러의 돈을 매년 연구비로 지원한다는 것은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독자들은 왜 하필 미군의 연구비를 이용했는지 의아해하리라 생각된다. 병원이나 연구소도 아닌 군이 생명을 구하는 일에 나서는 사실이 얼핏 와 닿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군의 출혈열 연구비 지원은 철저히 그들의 국가이익을 위해서라고 보면 된다. 내가 예뻐서가 아니라, 나에게 작은 돈을 몰아주는 것이 최대의 효과를 거둘 수 있다는 계산 때문인 것이다.
당시 미국은 우리나라에 8만 명에 이르는 군인을 주둔시키고 있었으며 해마다 수십 명의 출혈열 환자가 발생하고 수 명이 사망하는 상황이었다. 미국이 병사들의 안전과 사기진작에 기울이는 노력은 대단하다. 얼마 전 유고 내전 때 추락한 전투기조종사 한 명을 구하기 위해 항공모함과 인공위성이 동원되는 구출작전을 벌이는 데 수억 달러의 비용을 치르는 것을 TV로 보지 않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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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4년 설립된 고려대 바이러스 연구소 직원. 앞둘 왼쪽부터 성인화 교수, 이평우 교수, 필자, 이용주 교수, 백낙주 교수와 당시의 연구원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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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혈열 연구에 한창이던 1973년 봄, 나는 중대한 결심을 하게 된다. 바로 나의 모교인 서울대의대를 떠나 고려대의대로 간 것이다.
서울 혜화동에 위치한 우석대의대가 1971년 고려대에 흡수되면서 그 자리에 이름만 새로운 고려대의대가 탄생하게 되었다. 당시 고대총장이었던 김상협씨와 의대 학장이었던 이수정 교수가 나에게 고려대로 와 줄 것을 간곡히 부탁했으나 그 제의를 두 번이나 거절했다.
그러나 그 후 나에게 솔깃한 제안이 들어왔는데 욕심이 나는 것이었다. 첫째, 미생물학교실 주임교수 자리를 준다는 것인데 지금도 그렇지만 주임교수는 교수와 전공의 및 연구원 등 모든 인력의 선발과 예산 지출 등 교실운영을 책임지는 막강한 자리다. 둘째, 당시 국내엔 없는 바이러스병 연구소를 신설해 주겠다고 했다. 학자에게 자신의 연구소가 생긴다는 것은 꿈이나 다름없는 일이다. 셋째, 월급도 25만 원으로 올려 준다고 보장했다. 당시 서울대의대 교수의 한 달 급여가 8만 원이었으므로 한꺼번에 무려 3배나 올라가는 것이다. 넷째, 서울대병원 정신과 수간호사 출신인 집사람을 고려대 간호대 교수로 임명해 주겠다고 했다. 이 제안은 실효를 보지 못했다. 집사람이 몸이 안 좋아 도저히 대학에서 학생 교육과 연구를 수행할 수 없는 형편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머지 3가지 조건만 해도 파격적인 대우였다. 나는 결국 모교를 떠나기로 결심했다. 서울대의대 미생물학교실에서는 가 보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1년 내에 돌아오라고 했다. 그러나 나는 그때부터 1994년 고려대의대 교수와 학장을 끝낼 때까지 20여 년간 고려대에 몸담게 된다. 지금 와서 생각하니 그때의 결정이 잘한 것이었는지 아닌지는 나도 모르겠다.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다면 내가 학장시절 학계에 불기 시작한 정치바람이다. 학장과 총장을 직선제로 뽑게 되면서 입후보자는 표를 얻기 위해 많은 교수들에게 머리를 수그리고 운동을 해야 하는 일이 생긴 것이다. 게다가 동창회 신규 채용 교수는 모조리 본교 출신만으로 채워 달라는 압력이 오기 시작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