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문턱까지 갔던 김수암씨는 입원한 지 2주 후부터 조금씩 증상이 호전되어 구사일생으로 생명을 건질 수 있었다. 완쾌되어 한 달 만에 연구실을 찾은 그는 나에게 연구원 생활을 그만두겠다고 했다. 그에겐 미안하기 짝이 없었지만 나로선 일생일대의 과제인 유행성출혈열 연구를 포기할 순 없었다. 나는 용기를 내 그를 설득했는데 논리는 딱 하나였다.
이제 당신은 유행성출혈열에 걸렸다가 완쾌되었기 때문에 체내에 충분한 양의 특이항체가 생겼으므로 다시는 이 병에 걸리지 않을 거라고 했다. 다시 말하면 면역이 생겼기 때문에 유행성출혈열 연구의 적임자이며 현장에서도 마음 놓고 들쥐를 잡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란 뜻이었다.
우리나라에 창궐하는 괴질의 원인을 우리가 밝혀내야 한다는 사명감도 강조했다. 만일 다시 이런 일이 생기면 치료비는 물론 가족의 생계 등 이후 발생하는 모든 문제는 내가 전적으로 책임지겠다는 이야기도 덧붙였다.
다행히 그는 실험실로 복귀했다. 그가 돌아오면서 다른 연구원들도 마음이 바뀌어서 연구실로 돌아와 한 달 만에 겨우 실험을 다시 시작할 수 있게 됐다. 그 후 김수암씨는 비록 중졸 학력이었지만 나의 연구 생활에서 없어선 안 될 중요한 존재가 되었다. 그는 실험에 필요한 야생동물들을 잡아 연구실에 공급하는 것은 물론 피를 뽑는데도 천부적인 능력을 보여 줬다.
대부분의 바이러스 실험은 살아 있는 동물의 혈액이 필요한데 그는 실처럼 가느다란 뱀의 심장이나 쥐의 꼬리 혈관에 바늘을 찔러 피를 척척 뽑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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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2년 한탄강에서 교실원과 함께 찍은 사진. 이 중에서 실험 중 유행성출혈열에 걸린 사람이 여러 명이나 있다. 서 있는 사람 중 오른쪽에서 첫 번째 김수암, 세 번 째 백낙주, 여섯 번째 주용규, 앞줄 오른쪽 첫 번째 이용주, 두 번째 필자, 세 번째가 유선자 연구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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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행성출혈열의 병원체인 한탄바이러스를 발견하고 이 바이러스를 가지고 동물실험을 하면서 연구실에서 김수암씨처럼 유행성출혈열에 걸린 연구원이 8명이나 발생하였다. 이 중 7명은 동물실에서 동물을 만지다가 감염됐지만 한 번은 조직배양을 담당한 실험실 기술자가 연구실에서 감염됐다. 그녀는 유행성출혈열을 진단하기 위한 슬라이드를 하루 종일 기름난로 옆에서 만들다가 공기 중에 떠다닌 바이러스가 호흡기로 들어가 감염된 것이다. 나흘 동안 고열과 소변에서 피가 나온 그녀는 심한 요통을 겪어야 했지만 병원에 입원할 정도는 아니었다.
유선자 연구원은 단언컨대 바이러스의 조직 배양에 있어서 국내 최고의 기술자였다. 어떤 종류의 세포를 갖다 줘도 바이러스를 척척 배양해 냈다.
김수암씨와 마찬가지로 유선자 연구원도 내가 미국 유학에서 돌아와 서울대의대에서 전임강사를 한 시절부터 지금까지 약 40년간 생사고락을 같이한 실험실 가족이다.
현재 김수암씨는 목암생명공학연구소에서 러시아에서 유행하는 유행성출혈열 바이러스의 백신개발을 위한 동물실험을 하고 있으나, 유선자 연구원은 지난여름 은퇴했다. 나는 그들을 지금도 내 가족같이 생각하고 돌보고 있다. 실험 도중 유행성출혈열에 감염된 사람 가운데 특히 기억에 남는 이는 현재 고려대의대 미생물학교실 주임교수로 있는 백낙주 교수이다. 당시 그는 대학원 학생이었고 나의 중요한 실험실 연구원이었는데 그도 동물실에서 연구 중 유행성출혈열에 걸렸으나 다행히 감기처럼 넘어갈 수 있었다.
유행성출혈열을 일으키는 원인 바이러스인 한탄바이러스는 이호왕이 혼자서 발견한 것같이 기록되어 있지만 솔직히 말해 이들의 숨은 공로가 없었다면 바이러스 발견은 불가능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