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사람들이 유행성출혈열 연구는 한국에서 내가 처음 시작한 것으로 알고 있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한국인으로서 이 연구의 시초는 나의 은사인 서울대의대 미생물학교실 기용숙 교수라고 할 수 있다.
기 교수는 1964년 한국군에 유행성출혈열 연구반을 조직하고 자문관을 맡았다. 휘하에는 양용태 대위와 백상호 대위가 있었고 그들이 실무를 담당했으며, 국립보건연구원에 연구실을 차렸다.
1965년엔 의사들의 사표로 기억되는 고(故) 장기려 박사의 아들이자 서울의대 해부학교실 교수인 장가용 소령 등이 연구반을 인계 받았으며, 1967년엔 최성배 대위가 연구반을 인계받았다.
1968년엔 일본국립보건원 바이러스 연구부에 적을 둔 오쿠노(奥野) 박사가 세계보건기구 자문관 자격으로 한국에 파견돼 국립보건연구원에서 유행성출혈열의 원인 규명에 관한 연구를 3년간이나 했으나 실패하였다. 내로라하는 약 200명의 미국 과학자들도 한국전쟁 직후부터 내한해 유행성출혈열이라는 괴질의 원인을 발견해 내려고 약 20년간 노력했지만 모두 허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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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수암 씨는 35년째 나와 동고동락하고 있다 / 사진은 그가 1971년 송내리 논두렁의 쥐구멍에서 들쥐를 잡고 있는 모습이며 이때 병에 걸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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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1970년 12월 미국육군의 연구비 지원으로 유행성출혈열 연구를 의욕적으로 시작했지만 나 역시 처음엔 그들과 같이 오리무중 속을 헤매야 했다. 1972년 들쥐 조직으로부터 채취한 이상한 미생물 9개를 돼지 신장세포에서 배양 분리하는 데 성공했다. 처음엔 원인 바이러스를 발견한 것이 아닌지 잠시 흥분하기도 했으나 이내 출혈열 환자의 회복기 혈청과 반응하지 않은 것을 확인하고 힘이 빠졌다.
1973년에는 2개의 미확인 바이러스를 다시 발견했다. 다행히도 이들 중 일부 샘플이 환자의 혈청과 반응했으나 그 후 환자뿐만 아니라 정상인의 혈청과도 반응하는 것을 관찰하였다. 원인 바이러스라면 당연히 출혈열 환자에게 선택적으로 반응해야 한다. 알고 봤더니 이 미지의 바이러스는 유행성출혈열의 원인 바이러스가 아니라 사람과 쥐의 장기에 흔히 감염되어 있는 레오바이러스로 판명됐다.
레오바이러스는 전 세계에 광범위하게 분포되어 있으며 한국인의 경우 정상인이라도 90%가 이 바이러스에 대한 항체를 갖고 있음을 밝혀냈다. 절반은 성공했다고 생각했는데 레오바이러스로 밝혀지면서 갑자기 희망이 사라지고 차츰 연구에 대한 스트레스가 쌓이기 시작했다. 초조해지는 것은 물론 집에서 신경질을 내는 일도 잦아졌다. 학자는 공명심에 앞서 냉정하게 연구 결과를 분석하고 새로운 각오로 연구를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교훈을 뼈저리게 느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