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자 혈액 속의 새로운 면역항체...

거듭된 실패로 초조해 있던 나는 1974년 들쥐의 비장(脾臟)을 공략하기 시작했다. 볼리비아 출혈열 바이러스에 감염된 칼로미스란 이름의 들쥐의 비장은 정상 쥐의 비장보다 10~20배 이상 커진다는 사실에서 실마리를 얻은 것이다.

나는 우리나라에서 유행성출혈열을 옮길지도 모르는 들쥐인 등줄쥐의 비장도 커져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유행성출혈열이 발생하는 지역마다 찾아다니며 수백 마리의 등줄쥐를 생포해 배를 가른 뒤 비장을 살피고 무게를 쟀다. 그러나 비장이 커진 쥐는 한 마리도 없었으며, 현미경으로 조직학적 검사도 했으나 이상한 점을 찾아내지 못했다.

1970년부터 미군의 연구비로 시작한 나의 유행성출혈열 연구는 4년째가 되어도 아무런 진전을 보지 못했다. 쥐의 체내에서 원인 바이러스를 찾아내려 한 나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다. 이젠 환자를 연구하기로 했다. 병에 걸린 사람의 체내에는 원인 바이러스에 반응하는 항체가 있으리란 생각에서다. 지금은 보편화된 방법이지만 당시로선 첨단기법인 전기영동법과 한천면역확산법을 동원해 한국인 환자는 물론 미국인 환자의 혈액까지 조사해봤다.

1974년 말 나는 드디어 조그만 개가를 올리는 데 성공했다. 유행성출혈열 환자의 혈액 중에 몇 가지 종류의 특이한 면역항체가 증가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밝혀 낸 것이다. 발병 후에 증가한 특이항체를 찾아냈으니 이제 이 항체를 이용하면 환자나 들쥐의 조직 속에 미꾸라지처럼 요리조리 피해 가며 정체를 밝히길 거부하는 병원체를 찾아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 미국육군의학 연구 및 전염병연구소 분자생물학연구실장 고 다림플 박사(오른쪽) / 그는 나와 함께 서울바이러스를 미국 카탈로그에 등록함

신데렐라의 유리구두(바이러스에 대한 항체)를 찾았으니 이제 이 구두에 맞는 발을 가진 아름다운 소녀(바이러스 항원)만 찾아내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바이러스를 찾아내는 일은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나는 면역형광항체법과 면역전자현미경법이라는 첨단기법을 동원했다. 냉동절단기에서 잘라 낸 환자와 쥐의 각종 조직편에 항체가 있는 환자 혈청을 가하고 다시 형광색소를 결합한 산양의 사람 혈청에 대한 면역혈청을 혼합하여 30분간 반응시킨 뒤 형광현미경으로 바이러스를 찾아내는 방식이다. 이를 위해 나는 새로운 형광현미경을 구입하고 비록 중고품이긴 하지만 냉동조직절단기를 미군으로부터 지원받았다.

새로운 실험기법을 익히기 위해 우리 연구진의 일원인 이평우 당시 조교를 가톨릭의대 병리학교실에 2주간 파견했다. 이때부터 1년간이나 바이러스를 찾기 위해 무던히 애를 썼다. 그러나 연구를 거듭할수록 우리의 테크닉은 좋아졌으나 정작 원하던 바이러스는 영영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당시 우리는 들쥐의 장기 가운데 폐장만 버리고 나머지 장기는 다 검사했다. 폐장은 유행성출혈열과 전혀 상관이 없는 장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버렸다. 게다가 유행성출혈열의 병원체는 혈관과 콩팥을 공격해 신부전증 등의 질환을 일으켜 환자를 사망하게 하므로 바이러스는 분명 콩팥에 존재하리라고 믿었다. 나중에 자세히 설명하겠지만 이것이 나의, 아니 지금까지 유행성출혈열 바이러스를 찾아내기 위해 달려든 전 세계 모든 과학자들이 실패한 원인이었다.

1975년 가을 나는 일본에 있던 미국육군의학연구개발사령부 사령관인 마셜 대령으로부터 더 이상 나에 대한 연구비 지원이 어렵게 됐다는 통보를 받았다. 그는 지금도 내가 가장 고맙게 생각하고 있는 은인으로 무려 6년간에 걸친 미국육군의 연구비 지원을 가능하게 한 후원자였다.

그러한 그로부터 이젠 자기도 어찌할 수 없다는 소릴 들어야 했다. 미국육군성에서 지지부진한 내 연구 결과에 대해 연구비를 더 이상 낭비할 수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는 것이다. 게다가 내 연구의 돈줄이었던 극동지구 의학연구개발사령부도 1976년 3월에 폐쇄된다고 했다.

유행성출혈열 바이러스를 찾아내기 위한 나의 노력도 이제 수포로 돌아가게 됐다고 생각하니 눈앞이 깜깜하기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