잇따른 좌절에다 연구비 지원 중단까지 통보받은 나는 난감하기 이를 데 없었다. 연구도 연구지만 그때까지 나를 따르던 연구원들의 생계는 어떻게 해결한단 말인가. 그러나 하늘도 무심치는 않았다. 나는 아주 우연한 기회에 희망의 영감을 얻을 수 있었다.
1974년 여름, 연구가 마음대로 되지 않아 고민하던 나에게 한 개의 소포가 배달됐다. 오래 전부터 유행성출혈열을 연구하다 미국국립보건원에서 은퇴한 젤리슨 박사가 보낸 것이었다. 그는 소포 속에 있는 책자와 함께 보낸 편지에서 자신의 연구 결과를 종합했을 때 유행성출혈열의 원인은 들쥐의 폐에 기생하는 곰팡이의 독소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었다.
나는 유행성출혈열의 원인이 곰팡이란 그의 주장엔 동의하지 않았다. 그 동안 들쥐와 환자를 대상으로 이 잡듯 모든 장기를 뒤졌지만 곰팡이를 의심할 만한 증거는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폐란 단어에선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나를 비롯해 지금까지 유행성출혈열 연구에 매달렸던 숱하게 많은 석학들도 폐만은 조사 대상에서 제외해 왔기 때문이다.
환자의 콩팥과 비장, 간장, 심장, 뇌 등 다른 장기에선 출혈을 비롯한 병변이 관찰되어 관심의 대상이었지만 폐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많은 학자들이 쥐를 잡으면 폐는 으레 쳐다보지도 않았던 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환자의 병리학적 소견을 우선시하고 자연계 숙주동물의 특이성을 무시한 틀에 박힌 증거물 위주의 연구 관행이 가져온 실수였다.
나는 편지를 받은 날 연구원들에게 오늘부터는 쥐의 폐도 버리지 말고 조사하라고 지시했다. 이미 우리는 유행성출혈열의 특이항체를 분리해 내는 기술을 확보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항체를 지금까지 숱하게 많은 들쥐의 다른 조직과 반응시켜 보았지만 양성반응을 나타내는 항원은 찾지 못했다. 그런데 1975년 10월 11일 처음으로 정체불명의 항원이 감지됐다. 들쥐의 폐를 비롯해 뇌와 간장, 비장 등 수백 개의 샘플에 환자의 항체가 있는 혈청을 반응시킨 결과 11개의 조직 편에서 형광항체가 반응하여 노란빛을 발하고 있는 물체를 발견한 것이다. 놀랍게도 이들 11개의 조직 편은 모두 들쥐의 폐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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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직 배얀한‘한탄바이러스’형광 현미경 사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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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것이 실험에서 가끔 일어나는 비특이적 반응이 아니란 점을 확인하기 위해 지금까지 우리가 확보한 모든 들쥐의 조직을 한 번 반응시켜 보았다. 결과는 마찬가지로 특이한 것이었다. 그러나 흥분을 억누르지 못하고 섣부른 결과를 발표하여 망신을 당한 학자가 어디 한두 명이었던가. 이때부터 나는 침착하게 6개월간에 걸쳐 수십 번 반복하여 우리가 발견한 연구 결과가 사실인지 아닌지를 확인에 확인을 거듭했다.
1976년 1월 추운 어느 날 혜화동에 위치한 내 연구실에서 있었던 일이다. 그날도 나는 밤 10시까지 중국집에서 울면을 시켜 먹으며 지금은 고려의대 미생물학교실 교수로 있는 이평우 조교와 마지막 확인 작업을 계속하고 있었다. 형광현미경 연구실은 천장에 구멍이 두 개나 뚫려 있었고 구공탄으로 난방을 하던 빈약하기 그지없던 작은 하꼬방 같은 방이었다.
실험결과를 종합하면서 다시 한 번 등줄쥐의 폐에서 유행성출혈열 바이러스의 존재를 확인한 나는 천장구멍을 통해 밤하늘에 숱하게 널려 있는 별들을 바라보며 감회에 젖어 있었는데, 옆에 있던 이평우 조교가 상기된 얼굴로 “선생님 확실합니다. 1976년은 선생님의 해가 될 것입니다”라고 자신 있게 말하는 것이 아닌가.
나의 일생에서 가장 감격스런 순간이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페니실린을 처음 발견해 노벨의학상을 수상한 영국의 미생물학자 플레밍은 자신의 발견이 우연의 일치란 비난을 당시 학계로부터 받아야 했다. 그러나 그는 노벨상 시상식 연설에서 “과학자에게 우연은 없다. 우연은 오직 기다리는 사람에게만 찾아오는 선물일 뿐이다”라고 반박하지 않았다던가.
어쩌면 폐에 주목해야 한다는 착안은 한 통의 편지로부터 내게 우연히 다가온 행운일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폐에서 바이러스를 증명해 낼 수 있는 특이한 항체란 무기를 가지고 준비하고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기회란 준비된 사람만이 잡을 수 있다는 말을 하고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