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탄바이러스 발견으로 우리의 업적이 널리 알려지면서 나를 곤혹스럽게 한 것 중 하나가 바로 북한의 비방이다. 1976년 여름부터 휴전선 일대 비무장지대에서 북한 군대는 확성기를 통해 남조선의 이호왕이라는 생물학자가 미군의 앞잡이로 세균전 연구 끝에 새로운 바이러스 무기를 만들어 냈다는 것이었다.
하긴 한국전쟁 당시 수천 명의 중공군과 인민군이 유행성출혈열로 사망한 바 있어 그들로선 내 연구 결과에 대해 발끈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실제 들쥐 채집에 나선 김수암씨는 경기도 북부 야산에서 수차례 나를 원색적으로 비난한 삐라를 주워 들고 헐레벌떡 내게 달려온 적도 있었다.
주워 온 삐라는 경찰에 신고했다. 나도 아연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땐 남북이 팽팽히 맞서고 있었던 냉전시기였으므로 북한이 나를 세균전의 두목쯤으로 지목해 테러를 가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 해 9월 14일 연구소에서 밤늦게 동대문구 회기동에 있는 집으로 돌아온 나에게 아내가 심상치 않은 표정으로 오늘 학교에서 무슨 일이 없었느냐고 물어 왔다. 나는 별일 없었다고 말했는데 아내 말로는 이상한 전화가 집에 걸려 왔다는 것이 아닌가. 전화를 건 사람은 경상도 사투리를 쓰는 50대 남자 같았는데 저음으로 “이 박사가 발표한 유행성출혈열 바이러스 발견은 엉터리다. 이 박사는 미국놈 앞잡이다”라고 비난한 후 일방적으로 끊었다는 것이다.
전화는 며칠 뒤 다시 걸려 왔다. 일요일 저녁, 골프를 치고 집에 들어서자마자 전화벨이 울려 댔다. 이번에는 내가 직접 전화기를 들었다. 아내가 말한 그대로였다. 일방적으로 나에게 엉터리라는 비방을 퍼붓다 끊은 것이다.
당시 재일 조총련계 교포 1백여 명이 사상 최초로 모국방문단으로 한국에 와 성묘도 하고 산업시설을 시찰하고 있었다. 혹시 북에서 보낸 간첩이 나를 해칠 목적으로 일본에서 이들과 섞여 서울에 들어온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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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9년 유고슬라비아 드로브니크에서 개최된 유행성출혈열학회에 참석한 북한 미생물연구소의 김낙제 교수(왼쪽)와 유철 교수(오른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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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새도록 잠을 설친 나는 다음날 아침 서울시경의 대공수사과에 연락해 도움을 청했다. 순진한 나는 간첩의 소행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랬더니 경찰은 나에게 소형 녹음기를 보내며 앞으로 집으로 걸려 오는 모든 전화에 대해 녹음을 하라고 지시했다. 나는 시키는 대로 기다렸다가 세 번째로 걸려 온 괴전화를 차분하게 녹음할 수 있었다.
그런데 전화를 건 사람도 이번에는 이를 눈치 챘는지 갑자기 목소리가 달라지며 차분해지는 것이 아닌가. 아마 전화기에 수건을 갖다 대고 말하는 것 같았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가 매우 전문적인 의학용어를 사용하며 나의 연구 내용에 대해 언급한 것이었다. “CF(보체결합반응검사)를 한번 해 보시지요”라거나 “선생이 선택한 FA(형광항체검사)보다 CF가 훨씬 좋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CF나 FA같은 전문용어는 미생물학을 전공한 전문가가 아니면 알 수 없는 말이다. 순간 나는 이 사람이 간첩은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내가 계속 캐묻고 들어가자 그는 국립보건원의 김경호 박사까지 언급하는 것이 아닌가. 그는 국립보건원의 연구원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왜 나에게 자신의 신분을 밝히지 않고 이상한 시기 어린 협박전화를 해대는 것일까. 나는 보건원의 김경호 박사와 백승복 박사를 불러 테이프에 녹음된 전화내용을 들려주며 아는 사람인지 물어 봤다. 김박사는 안색이 하얗게 변하며 당황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잘 모르겠다고 답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백박사는 아는 사람의 목소리 같다고 했다. 그러하면 더 이상 떠들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자연히 밝혀지게 될 터이니까.
내게 걸려 온 괴전화 사건은 입소문뿐만 아니라 전문지를 타고 퍼지기 시작했다. 당시 보건사회부 박승함 차관은 내게 누군지 밝혀내면 인사 조치를 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나는 이 문제를 그냥 덮어 두기로 했다. 괴전화 사건이 공론화된 뒤 네 차례나 걸려왔던 괴전화가 뚝 끊어졌기 때문이다. 아마 더 전화를 했다간 신분이 발각될까 두려웠던 모양이다.
지금도 나는 그가 누구인지 모르며 알고 싶지도 않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가 남 잘되는 것을 못 견뎌하고 비방과 투서를 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일종의 편집증 환자란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