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6년은 내가 세계 최초의 유행성출혈열 바이러스 발견으로 학자로서 최고의 전성기를 맞은 해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전 세계 언론에 대서특필되는 영광과 함께 예기치 않은 시련도 찾아왔다. 바로 국내외 학자들의 의심쩍은 눈초리였다.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 학자들의 의심이야 그들이 수십 년간 직접 연구를 하였으나 실패했기 때문에 의심 반 질투 반이었으리라 짐작할 만했다.
그러나 연구도 해보지 않은 국내 학자들의 뒷말은 내가 감당하기 힘들 정도였다. 많은 학자들이 해보지도 않고 나의 발견에 대해 언론에 부정적으로 이야기했다. “선진국의 일류학자들도 실패했는데 이호왕이 한국에서 성공했다는 것은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식이었다. 심지어 나의 모교였던 서울대의대 내과학교실에서도 “좀 더 지켜봐야 한다”고 기자들에게 말했다. 이 점에서 나는 이미 고인이 되었지만 당시 서울대 미생물학과 주임교수였던 홍순웅 박사에게 감사한다.
유일하게 홍교수만이 나의 경력과 학문적 배경을 감안할 때 충분히 나올 수 있는 연구 결과라며 언론에 긍정적으로 평가해 줬기 때문이다. 외국 학계로부터 쏟아진 의문의 화살은 훨씬 고단수였다. 볼리비아출혈열 바이러스의 발견자로 파나마 방문 때 내게 실험기법을 한 수 지도해 준 존슨 박사의 의심은 지금도 기억에 선하다.
그는 내게 자신이 보관하고 있는 정상인과 한국전 때의 미국인 출혈열 환자 혈청을 암호로 매긴 후 보낼 테니 한번 맞혀 보라고 했다. 10개의 검사샘플이 미국 CDC에서 우편으로 서울에 도착했다. 그런데 희한한 것은 그 중 4개가 같은 번호로 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나는 4개가 모두 같은 사람의 혈청인 줄 알고 그 중 1개만 골라 다른 6개의 혈청과 같이 테스트한 뒤 결과를 그에게 보냈다. 그랬더니 존슨 박사는 내가 검사하지 않은 3개의 샘플 중 1개가 환자의 것이니 다시 검사하여 그 결과를 보내 달라고 하였다. 나는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같은 번호의 혈청을 4개나 보냈다는 사실 자체가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에 무엇인가 내막이 있다는 의심이 들었다.
나는 그에게 자초지종을 이야기하고 나머지 3개를 검사했더니 그 중 한 개가 양성으로 나와 이럴 수가 있느냐고 엄중하게 항의했다. 이내 그에게서 사과의 답장이 왔다. 자신의 아내 웹이 샘플에 라벨을 붙일 때 실수로 4개에 같은 번호를 매겼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나를 떠보기 위해 만든 핑계에 불과했다.
지금 생각해도 나는 그의 아내에게 고의성이 있다고 확신한다. 상식적으로 이런 일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만일 내 연구가 완벽한 것이 아니었다면 그들의 고등전술에 걸려 엉터리로 밝혀지고 자신들은 이를 밝혀 낸 전문가로 평가되길 바랐는지도 모른다.
내게 연구비를 지원한 미국육군본부의 일부 전문가도 의심을 했다. 이미 나에게 연구비 지원 중단을 통보했던 터에 내가 갑자기 성공했다고 하니 필경 연구비를 더 타내기 위한 정치적 쇼라 본 것이다. 그들은 회의를 열고 미육군의학연구 및 전염병연구소 바이러스연구부의 프렌치 중령을 10월 초 서울에 파견해 나의 연구 결과를 직접 확인하도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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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의심을 잠재우기 위해 미국 메릴랜드 주 미국육군의학연구개발사령부를 1977년 방문 / 오른쪽에서 3번째가 육군 소장 러셀 사령관, 중앙이 필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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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것으로 모든 게 끝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내게 미국을 방문해 연구 과정과 결과를 소상하게 밝혀 줄 것을 요구했다. 이렇게 하여 나는 1977년 1월 후레드리크에 있는 미국육군의학연구개발사령부를 찾았다. 끊임없이 솟아오르는 의심의 불길에 종지부를 찍기 위해선 이 분야의 대가들이 모여 있는 미국에서 직접 강의를 하고 인정을 받을 필요가 있었다.
나는 미국에 도착하자마자 미국육군의학연구 및 전염병연구소에서 첫 번째 강의를 했다. 약 200명의 청중 중에는 6·25때 한국과 일본에서 유행성출혈열 연구를 한 붓샤 대령도 있었다. 그는 출혈열 연구를 10여 년간 하였으나 실패한 사람으로 나의 성공을 믿지 않은 많은 사람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나의 강의를 듣고 말없이 그 자리를 떠났다고 들었다.
나는 강연 후 열렬한 박수를 받았고, 미군사령관은 나를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당시 각종 출혈열 바이러스를 비롯한 동물 바이러스의 면역학 분야에선 미국 예일대의대의 카잘스 교수가 최고 권위자였다. 적어도 항원과 항체가 만나 이루어지는 면역반응에 관한 한 그가 예스라면 예스고, 노라면 노라고 학계에서 인정할 정도였다.
내가 예일대학에서 두 번째 특강을 한 후 그는 그가 보관하고 있는 소련 출혈열환자 혈청과 정상인 혈청 합계 20개의 미지의 혈청을 주면서 검사해 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서울에 갖고 와 검사를 한 결과 이 중 6개가 환자의 것이고 14개는 정상인의 것임을 완벽하게 밝혀냈다.
그는 나의 검사 결과를 받아 보고 축하한다는 편지와 함께 나의 연구 결과가 흠잡을 데 없다는 사실을 미국육군에 통보했다. 1975년 10월 처음 바이러스를 발견하고 1976년 4월 언론에 발표한 이래 1년이라는 세월이 지나서야 미국 학계의 인정을 받은 셈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