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6년 4월, 나는 설레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이수종 의대 학장에게 정식으로 나의 연구 결과를 보고했다. 그리고 각종 신문사에 연락하여 교수 회의실에서 가진 기자회견을 통해 지금까지 베일에 가려져 왔던 유행성출혈열의 원인 바이러스 발견 사실을 공개했다.
1976년 4월 29일 모든 신문에 내 연구 결과가 대서 특필됐다. 당시 산천초목도 떤다는 동아일보 1면 머리기사로 보도했다. 지금이야 한국의 연구 역량이 일취월장해 세계 최초라는 발견도 많지만 모든 것이 척박했던 당시로선 한국인 과학자의 연구 결과가 일류신문의 1면 머리기사로 게재되는 경우는 드문 일이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국내 언론뿐 아니라 5월 12일자 워싱턴포스트와 뉴욕타임스를 배롯한 해외 주요언론도 나의 발견을 보도했다는 사실이다. ‘미국에서 공부한 이박사(US trained Dr. Lee)’가 세계 최초로 유행성출혈열 원인 바이러스를 발견했다는 제목으로 게재됐다. ‘한국의 이박사’가 아닌 ‘미국에서 공부한 이박사’란 제목이 다소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나의 학문적 토대가 미국에서 이뤄진 것은 사실인 만큼 그들의 자존심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정작 나를 당황케 한 것은 언론 보도 후 한 달쯤 지나 다가왔다. 1976년 6월 미국 주간지 「타임」지의 토쿄특파원이 나를 찾아온 것이다. 중국계 미국인으로 성이 장(張)씨로 기억되는 이 특파원의 임무는 과연 후진국 학자에 불과한 내가 지금까지 내로라하는 선진국의 석학들도 풀지 못한 유행성 출혈열의 원인 바이러스 발견에 성공한 것이 사실인지 아닌지를 확인하는 것이었다.
「타임」지는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전 세계에서 가장 권위를 인정받는 주간잡지가 아니던가. 어느 정도 까다로울 것은 예상했지만 그의 취재는 나의 상상을 넘어선 것이었다.
연구실에 직접 나를 대면한 그는 여러 가지 날카로운 송곳 질문을 찔러 댔다. 연구의 절차는 물론 결과까지 꼼꼼하게 챙겼다. 어느 정도였느냐 하면 내가 유행성출혈열 바이러스의 중간숙주로 규정한 등줄쥐의 국제적 학명까지 런던국립박물관에 전화를 걸어 확인하는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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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행성출혈열 바이러스 발견 후 노벨상 수상자인 미국국립보건원 가이듀섹 박사(뒷줄 왼쪽에서 3번째)와 확인 차 국군수도통합병원을 찾았을 때의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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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처럼 E메일이나 인터넷이 없었던 때라 내가 제시한 우리나라 등줄쥐의 학명(Apodemus agrarius)과 실제 쥐의 사진을 보내 런던국립박물관으로부터 틀림없다는 응답을 받기까지 2주일이 걸렸을 정도였다.
그뿐 아니었다. 나와 함께 국군수도통합병원을 방문해 그곳에 입원해 있던 유행성출혈열 환자의 혈액을 채혈한 뒤 자기가 직접 아무도 모르게 번호를 매기고 맹검 검사(blind test)를 실시했다. 맹검 검사란 객관적인 사실 확인을 위해 환자와 정상인의 혈청을 혼합하고 시험관에 아무도 모르게 번호를 매긴 후 나에게 검사하게 하여 환자 혈청만을 골라내는 실험기법이다. 그는 정상인 혈청 5개와 환자 혈청 5개를 비밀리에 섞은 다음 내게 어느 것이 환자 것인지 맞춰 보라고 요구했다. 나는 우리 검사법으로 1백% 정확하게 가려냈다. 그랬더니 이번엔 국군수도통합병원이 아닌 용산에 있는 미8군 병원으로 가자는 것이 아닌가.
국군수도통합병원에선 혹시 사전에 짜고 조작할 수도 있으니 좀 더 객관적인 판단이 가능한 미군병원을 선택한 것이다. 좀 기분이 나빴지만 자신이 있었으므로 같이 미8군병원으로 갔다. 미군환자의 피를 검사하였는데, 물론 완벽한 결과가 나왔다. 드디어 그의 입에서 ‘congratulations(축하한다)’란 단어가 튀어나왔다. 한국에 도착한 지 2주일이 지난 뒤였다.
난 그의 프로정신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도 많은 기자들이 처음 접하는 연구 결과를 대할 때 연구자의 말만 듣고 그대로 보도하여 구설수에 오르는 일이 많다. 과대포장을 일삼는 비양심적인 연구자라면 언론이 이를 제대로 걸러 주지 않을 때 학계나 사회에 미치는 피해가 얼마나 지대할 것인가.
사실 확인을 하지 않는다면 기자가 아닌 필경사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나의 연구 결과는 1976년 6월 13일자 「타임」지 한 면에 걸쳐 ‘한국인이 발견한 쥐열’이라는 제목으로 자세하게 소개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