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스카웃 제의 (제33화)

오직 산꼭대기에 오른 사람만이 정상의 기쁨을 느낄 수 있다던가. 과학자에게 있어서 세계 최초로 새로운 병원체를 발견했다는 사실은 크나큰 영광이 아닐 수 없다. 돈을 벌어야 하는 기업가에겐 최후가 중요하지만 진리를 탐구하는 과학자에겐 최초가 중요하다.

1976년, 나는 한창 물이 오른 과학자로서 성공의 기쁨을 마음껏 구가하고 있었다. 지난 세월 겪어야 했던 숱한 역경도 여기저기서 쏟아지는 찬사 앞에선 한낱 카타르시스를 위한 준비작업에 불과했다. 세계 각국에서 특별강연을 해달라는 초청장이 쇄도했다.

나는 1977년 초 미국을 방문했을 때 미국국립보건원을 비롯한 유수한 대학과 연구 기관에서 나의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지원 중단을 통보했던 미국육군의 연구비가 연장됐음은 물론이다. 미국과 일본의 유명한 연구소에서 함께 일하자는 제의도 들어왔다.

미국국립보건원에서 강의를 마친 후 있었던 일이다. 강의를 마치자 당시 나를 초청한 미국국립보건원 뇌신경바이러스 연구부장인 깁스 박사는 나를 자신의 방으로 안내하고 2백50달러라는 당시로선 결코 적지 않은 강의료를 나에게 준 뒤 나에게 파격적인 제안을 했다.

원로연구원으로 매년 4만 달러의 연봉을 줄 테니 유행성출혈열 연구팀을 국립보건원에 만들어 팀장을 맡아 달라는 것이다. 실험기구와 재료는 원하는 대로 얼마든지 지원하겠다는 단서도 달았다.

미국국립보건원(NIH)은 예나 지금이나 전 세계 생명과학연구의 총본산으로 과학자라면 누구나 이곳의 일원이 되길 꿈꾸는 곳이다. 그런 곳에서 평범한 연구원이 아닌 팀장자리를 제안했으니 귀가 솔깃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당시 내 월급이 24만원이고 미국육군에서 받는 연구비는 1년에 1만5천 달러에 불과했으니 월급으로 따지면 무려 400배나 많은 연봉이 아닌가.

그날 저녁 나는 미국육군전염병연구소 바이러스 부장이었던 에디 대령의 집으로 초대됐다. 그는 대뜸 내게 “What was the big deal today?(오늘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물어 오는 것이 아닌가.

▲ 미국 NIH에서 같이 연구하자고 제의한 노벨의학상 수상자 가이듀섹 박사 (오른쪽)/ 그는 6.25 때 한국에서 출혈열 연구를 했다

에디 대령도 NIH에서 나를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았을 것이라고 미리 짐작한 것이지 아니면 무슨 말을 들은 것 같기도 했다.

하긴 미국육군으로서는 자신들이 공들여 키운 나를 하루아침에 NIH에 빼앗기기 싫었을 것이다. 유능한 사람을 파격적인 대우로 스카웃하는 것이 너무나 자연스러운 미국에선 내가 NIH로 옮긴다 해도 말릴 순 없는 일이었다.

나는 짧은 순간이었지만 많은 고민을 했다. 그리고 내린 결론은 조국에 대한 애국심과 의리를 지키자는 것이었다. 미국육군이 무명의 학자였던 내게 7년간이나 지원한 은혜를 저버리기 어려웠고 또 한국에서 이룩한 연구 업적을 미국에 가지고 갈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지금 생각해 보아도 당시 미국육군의 지원은 절대적이었다. 한국에 있었지만 필요한 실험기구나 시약은 한국 세관을 거치지 않고 미8군을 통해 1주일 이내에 나의 연구실에 도착했다.

여기저기에서 도장을 찍어야 겨우 실험기구나 시약을 얻을 수 있는 다른 한국 학자들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이 때문에 오해도 있었다. 한번은 김포 세관원들이 내 연구실로 들이닥쳐 연구 기구를 밀반입했다고 조사한 적도 있었다. 내가 세금 없이 물건을 미군부대에서 갖다 쓰니 이에 앙심을 품은 사무직원 한 명이 세관에 밀고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사용한 실험기구는 모두 미국 정부의 재산으로 되어 있었으며 내 개인 소유물이 아니었으므로 아무 탈이 없었다.

내가 NIH로 가지 않은 데엔 현실적인 이유도 있었다. 등줄쥐를 비롯한 유행성 출혈열 환자의 연구 재료는 모두 한국에 있었다. 워싱턴 근교 베데스다에 있는 NIH로 옮길 경우 실험을 위해선 미국과 한국을 오가야 하는 불편함이 불가피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결정적 이유는 한국에서 어렵게 이룬 연구 업적을 미국에 헌납하기 싫어서였다. 앞으로 내가 발표할 연구 결과는 전부 한국의 이호왕이란 이름으로 세계적인 학계지에 발표되지만 NIH로 옮기게 되면 미국 연구 기관의 몫으로 돌아가게 된다.

새삼 ‘과학엔 국경이 없다. 그러나 과학자에겐 조국이 있다’란 파스퇴르의 명언이 떠올랐다. 나도 조국을 빛낼 때라고 생각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