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왕 상(賞)이야기가 나왔으니 노벨상 얘기도 짚어 보는 것이 좋겠다.
김대중 대통령의 노벨평화상 수상으로 한국인 과학자의 노벨상 수상은 조금 빛바랜 느낌도 들지만 나만큼 국내외의 언론을 통해 노벨상 유력인사로 거론된 사람도 드물지 않았나 싶다.
내가 처음 노벨상 후보 이야기를 접한 것은 1977년 겨울 핀란드에 갔을 때였다. 헬싱키대학에서 유행성출혈열 병원체 발견 과정에 대해 강의했는데, 그곳 사람들이 내게 “당신의 연구 결과는 노벨상 감”이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이유인즉 몇 달 전 핀란드를 찾은 세계적인 바이러스학자인 미국국립보건원의 가이듀섹 박사가 유행성출혈열의 병원체를 찾아낸다는 것은 ‘impossible(불가능하다)’이라고 단언했다는 것이다.
쿠루라는 병의 원인을 규명해 낸 공로로 1976년 노벨상을 받은 가이듀섹이 불가능하다고 말한 것을 당신이 해냈으니 당신이야말로 노벨상을 받을 만하다는 논리였다. 그는 6·25때 한국에서 유행성출혈열에 대한 연구를 한 사람이다. 나는 1978년 의심의 눈초리로 나를 보던 가이듀섹 박사를 한국으로 초청해 나의 연구 결과를 보여 줬다.
당시로선 그가 한국을 찾은 최초의 노벨상 수상자였다. 기자들이 공항까지 몰려 나와 인터뷰를 하는 등 그의 방문은 언론에 대서특필됐다.
그는 1주일간의 한국 체류 동안 나의 연구실과 육군통합병원에서 우리의 연구를 일거수일투족 지켜봤다. 그는 돌아가는 날 기자회견에서 나의 연구에 대해 ‘a great breakthrough(위대한 업적)’라고 표현했다. 물론 서구인 특유의 치켜세우기도 있었겠지만 당시 내 연구가 세계 학계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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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의 노벨상 추천 기사 (한겨레신문 199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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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역시 노벨상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노벨의학상 수상자를 결정하는 스웨덴 카롤린스카연구소의 노벨의학상 심사위원회 사무총장인 린드스텐 박사를 1978년 스톡홀름에서 만난 뒤 1979년 봄 한국으로 초청했다. 스웨덴에서 의사생활을 하던 한국 교포 한영우 박사의 주선으로 이루어진 만남이었다.
린드스텐 박사는 내게 여러 가지 조언을 했다. 결론인즉 실험실에 파묻혀 지내는 학문 연구뿐 아니라 국제학계에 자신을 알리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해선 안 되며, 노벨상 수상자와도 가까이 지내라는 것이다.
노벨의학상은 전 세계에서 제한된 권위자들로부터 매년 약 2백 명 정도를 추천받는 것으로 시작한다는 사실도 알아냈다. 모든 과정은 철저하게 비밀이 유지된다.
특히 선발 과정에서 있었던 심사위원회의 토론 내용은 50년 후에야 공개된다는 것이 원칙이라 한다. 따라서 지금 이야깃거리가 되는 노벨상 뒷이야기는 전부 50년 전의 비하인드 스토리에 불과하다. 그러나 세상에 비밀은 없는 법이다. 알고 봤더니 이미 1970년대 초 한국에도 추천해 달라는 통지가 왔다는 것이 아닌가. 서울대의대 학장이었던 고 서병설 박사가 내게 털어놓은 바에 따르면 유감스럽게도 그땐 내 업적이 발표되기 전이라 한국엔 추천할만한 사람이 없다고 보고했다는 것이었다.
그 후 한국에 추천을 의뢰하는 통지는 오지 않았다 하니 우리로선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에이즈 연구로 국제적 권위를 인정받고 있는 캐나다의 토론토대학의 강칠용 박사가 가이듀섹 박사와 캐나다 학술원장을 통해 나를 노벨의학상 수상자로 추천했다는 이야길 들은 적도 있다. 내가 모르는 다른 누군가가 특히 핀란드대학의 교수가 나를 추천했을 수도 있다.
물론 노벨상이 로비를 통해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사람이 투표해서 결정하는 일이니만큼 비슷한 업적이라면 국력이나 인맥, 또는 사회활동 등에 좌우되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세균이나 바이러스연구에서 유전학이나 뇌신경질환으로 노벨상 수상자의 무대가 바뀌는 것도 내겐 불리한 추세다.
나는 이미 노벨상에 대해 미련을 버린 지 오래다. 그러나 올해 내한한 스웨덴 왕립과학원 사무총장 노르비 박사는 나에게 당신은 바이러스 발견 외에 예방백신 개발이란 플러스 알파도 있으니 한번 기대해 봐도 좋지 않으냐는 이야길 농담처럼 한 적이 있다. 최근 81세의 미국 학자가 30년 전의 연구 업적으로 노벨화학상을 받아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하였다. 사람 팔자는 모르는 만큼 일단 오래 살고 봐야 한다는 말도 실감이 난다. 노벨상은 아무리 탁월한 업적이라 해도 죽은 사람에겐 주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노벨상 수여식에 꼭 한번 참석하고 싶었는데 왕립스웨덴학술원과 노벨재단 초청으로 마침내 그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대한민국학술원 회장 자격으로 가는 것이었다. 2000년 12월 8일 저녁 서울을 출발, 런던을 경유하여 스톡홀름에 18시간 만인 새벽 1시에 도착하였으니 참으로 멀고도 긴 여행이었다.
이날 저녁 왕립스웨덴학술원 사무총장인 노르비 박사는 우리 부부와 과거 노벨의학상 사무총장이었던 린드스텐 박사 부부를 아주 특별한 저녁식사에 초대하였다. 초대받은 곳은 우리가 머물고 있던 쉐라톤 호텔 근처의 유명한 레스토랑이었다. 수백 개의 비싼 포도주를 보관하고 있는 지하실에 특별히 마련한 식탁에서 8시부터 약 2시간 동안 식사를 하였는데, 처음 느껴 보는 유럽식 분위기였다.
노르비 교수는 그때 나에게 노벨상 수여식 입장권과 만찬 초대장을 건네주었다. 우리는 15년 전부터 아는 사이라 옛날이야기와 노벨평화상에 관한 이야기로 꽃을 피웠다.
노벨상은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알프레드 노벨이 1896년 12월 10일 사망할 때 남긴 유언에 따라 세계 인류복지 향상에 기여한 위대한 발견과 공로를 세운 사람에게 주는 상이다. 당초에는 문학상, 물리학상, 화학상, 생리 의학상과 평화상의 4개 부문만이 있었으나 후에 경제학상이 추가되었다. 물리학상과 화학상은 왕립스웨덴과학아카데미에서 생리 의학상은 카롤린스카 인스티튜드에서, 문학상은 스웨덴아카데미에서, 그리고 평화상은 노르웨이노벨위원회에서 결정한다.
최근 스웨덴은행이 노벨을 기념하는 경제학상을 제정하고 노벨경제학상이라고 하고 있는데, 왕립스웨덴아카데미가 선정하고 있다. 매년 12월 10일 알프레드 노벨의 기일에 문학상, 물리학상, 화학상, 생리 의학상과 경제학상이 스웨덴 스톡홀름 시내에 있는 콘서트홀에서 수여되며 평화상은 같은 날 노르웨이 오슬로의 시티홀에서 수여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