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록 최초로 한탄바이러스를 발견해 미국 언론에 대서특필 되었고 노벨상 후보로 거론됐으며 대학교수를 거쳐 학술원 회장이 되고 나니 많은 사람들은 내가 어렸을 때도 공보를 잘했던 것으로 알고 있으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함경남도 신흥군의 신흥보통학교 시절에 나는 공부보다는 제기차기와 운동을 좋아하는 개구쟁이 소년이었다. 공부를 하지 않는다고 어머니께 꾸지람을 자주 들었던 기억도 난다. 20분 동안 계속 할 수 있는 제기차기 실력은 전교 1등이었다. 한남중학교 때는 학교를 대표하는 육상선수로 활동한 적도 있었다. 학교 성적은 그리 뛰어난 편은 아니었으나 잔교에서 5~6등 정도는 되었다. 의대에 진학한 것도 시골 한의사의 외동딸이었던 모친의 권유 때문이었다.
3․8선이 생긴 후 연로하신 부모님과 생이별을 한 나야말로 한 평생 이산가족의 한을 안고 살아온 셈이다. 나는 1986년 세계보건기구 자문관 자격으로 중국의 베이징을 방문했을 때 북에 두고 온 누이동생과 극적으로 상봉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때 부모님 모두 오래전에 돌아가셨다는 비보를 들어야 했다.
당시 국내 최고인 서울대의대에서 조교로 일하던 내가 우물 안 개구리임을 자각한 것은 미국이란 새로운 세계를 만나면서부터였다. 당시만해도 미생물학 실습이라고 해봐야 대장균, 포도상구균, 결핵균 등 간단한 세균 서너 종류의 염색을 하고 현미경으로 관찰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지금 의대생들이 실습하는 미생물의 배양과 동정분리는 엄두도 못낼 형편이었다. 그러나 전쟁 이후 물밀듯 밀려들어온 미국의 신학문은 나를 흥분시키기에 충분했다.
나는 조교시절에도 여름방학에는 회현동에 있는 보건연구원에서 한범석 박사와 미국 군인으로부터 예방의학을 배웠으며, 1955년 1월에서 3월까지 지금의 대방동 공군기지에 있던 미국 육군 121야전병원 임상세균과에서 미국인 소령에게 장내 세균의 분리 배양 방법과 최신 진단법을 배웠다.
그렇게 지내던 나에게 미국에서 공부할 수 있는 기회가 왔다. 미국 국무성에서 전쟁으로 폐허가 된 한국의 재건을 돕기 위해 서울대 의대 교수와 조교들을 미국 미네소타 대학의대로 연수 보내는 ICA프로젝트(1955~1962)를 마련한 것이다. 미국무성이 추진한 서울대학과 미네소타대학 교환교수 연수 계획 프로그램이 1955년에 처음으로 시행되었다.
첫 대상자들은 조교들이었으며, 미생물학 교실에서 내가 선발됐다. 나 외에 해부학 김재남, 생리학 이상돈, 약리학 임정규, 생화학 장금용, 병리학 이상국 등 기초의학 6명과 진단방사선과 김주완, 신경외과 심보성, 마취과 이동식 등 임상의학 분야에서 조교가 1차 선발대로 선정되었다.
이들 중 일부는 이미 타계한 분도 있지만 대부분 오늘날 국내 의학계의 기틀을 세운 선구자로 자리매김 되고 있다.
이들 조교 외에 이비인후과 백만기, 소아과 홍창의, 내과 한심석, 생리학 남기영, 외과 진병호 등 기라성 같은 서울대의대 교수들도 우리 조교 일행과 같이 미내애폴리스행 비행기를 타게 됐다. 지금이야 미국 여행아 아무것도 아니지만 당시로서는 꿈같은 일이었고, 모두가 부러워하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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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5년 8월 여의도 비행장에서 미국으로 떠나던 날 / 왼쪽으로부터 형 이호윤 육군헌병 중령, 나, 동창생 김덕주(캐나다 거주), 고 김순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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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년 9월 15일. 외무부에서 직접 여권을 받고, 여름에 비만 오면 물레 잠기는 허허벌판인 여의도 군용 비행장에서 처음 보는 프로펠러 4개가 달린 미국 노스웨스트사 항공기에 탑승할 때의 설레임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우리는 비행기 좌석에 구별이 있는지 없는지조차도 몰랐으며, 그저 시키는 대로 앉기만 했다.
그러나 설레임도 잠시 뿐, 1등석에 탔지만 이내 서투른 영어로 실수가 잇따라 터져 나왔다.
미국 출국 전 두 달이나 서울대 안에 있는 외국어학교에서 영어공부를 했지만, 지금처럼 회화공부 코스가 따로 있지 않아서 회화는 엉망이었고, 영어사전 하나를 호주머니에 지참한 것이 영어실력의 전부였다. 기내에서 예쁘고 날씬한 금발의 스튜어디스가 음료와 식사 주문을 받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무도 그녀의 말을 제대로 알아듣는 사람이 없었다. 한 사람이 뭐j라고 하면 모두 똑같은 대답 일색이었다. “미 투(Me too)”라고. 결과는 제일 앞자리에 앉은 사람과 똑같은 쇠고기 스테이크에 버터를 바른 느끼한 빵이었다. 그래도 물은 달라고 했다.
메뉴를 바꾸고 싶었지만 말을 꺼낼 엄두가 나지 않았고, 서비스로 제공하는 커피나 와인을 달라는 말도 하지 못했다. 명색이 서울대의대 교수요, 조교였지만 영어실력은 젬병이었던 셈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