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문적으로 뛰어난 창의성과 비범함을 보여 준 연구 결과라도 실익이 없다면 빛이 바래진다. 선진국의 에이즈가 아프리카의 이름 모를 무서운 풍토병보다 중요하게 여겨지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 점에서 나는 유행성출혈열과 유사한 질환이 다른 나라에서도 발생했고 그것이 한탄바이러스나 서울바이러스 때문이었는지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첫 번째 무대는 일본이었다. 1960년대 초 일본 오사카(大阪) 시내 복판에서 유행성출혈열과 유사한 환자들이 집단으로 발생했다. 오사카 도심에 위치한 우메다(梅田)역을 중심으로 한 지역이었는데 60여 명의 환자가 발생해 이 중 3명이 숨졌다.
이를 처음 보고한 일본인 의사는 우메다 역 근처에서 동네의원을 열고 있었던 타무라(田村) 박사였다. 그는 고열과 함께 신체 곳곳에 출혈증상을 보이고 콩팥이 망가져 소변이 나오지 않는 괴질을 접하고 이는 제2차 세계대전 때 중국에서 발생한 유행성출혈열과 유사하다고 확신했다. 그러나 당시 일본 학계에선 유행성출혈열이라는 병은 만주 일대, 그리고 한국에서나 발생하는 풍토병으로 생각하였고 그때까지 일본에서 발생한 전례가 없었기 때문에 그의 주장을 일축했다.
나는 그들의 논문을 보고 분명 유행성출혈열과 관련이 있다는 의심을 갖고 오사카대 미생물병연구소의 오쿠노 소장에게 환자의 혈청을 구할 수 있으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편지를 보냈다. 유행성출혈열 환자였다면 혈청 속엔 분명 한탄바이러스에 대한 특이항체가 남아 있으리라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속으로 제대로 될지 반신반의했다. 그때가 1976년 11월이었으니 오사카 괴질 사건이 생긴 지 이미 10년이 훨씬 지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뜻밖에도 그에게서 혈청을 구해 보내겠다는 응답을 받았다. 타무라 박사의 아들도 의사인데 그가 옛날 환자의 차트를 찾아 주소를 수소문한 다음 일일이 옛 환자의 집을 찾아가 간곡히 부탁하여 채혈하는 데 성공했다는 것이었다. 말은 쉽지만 이것은 결코 만만치 않은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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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금도 나와 교분을 맺고 있는 효고의대 교수인 다무라 박사의 아들(오른쪽)과 오사카대 미생물병 연구소 소장 가와마다 교수(왼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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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전 환자의 진료자료를 고스란히 보존하고 있었다는 사실도 놀랍지만 헌혈도 마다하는 세태 속에 아무 실익도 없이 환자들이 자신의 피를 제공하였다는 것은 우리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작은 기적이랄 수 있는 옛날 환자의 혈액 채취 성공은 아버지의 평생 숙원이었던 괴질의 정체 규명을 위해 헌신적으로 뛰어든 아들의 공이라 할 만하다. 나는 1977년 초 아들이 보내 온 25개의 혈청 중에서 환자의 혈청 14개를 족집게처럼 가려내 이것이 한탄바이러스에 의해 생기는 병과 동일한 것임을 밝혀냈다.
1977년 10월 20일, 나는 일본 오사카(大阪)에서 열린 제25회 일본바이러스학회에 초빙돼 오사카에서 발생한 괴질이 바로 한탄바이러스나 서울바이러스 때문임을 발표했다. 내가 학회 강당에서 발표를 끝내자마자 청중 뒤쪽에서 휠체어를 탄 노이니 한 명이 일어서 두 손을 번쩍 높이 들면서 “이호왕 박사 만세!”를 세 차례나 크게 부르짖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옆에 있던 젊은 남자와 함께 눈물을 흘리며 얼싸안고 있는 것이 보였다. 알고 봤더니 그 노인과 젊은 남자는 오사카 괴질이 유행성출혈열임을 주장한 타무라 박사 부자였다. 그들로선 당시까지 아무도 인정해 주지 않았던 자신의 주장이 나를 통해 바이러스학적으로 검증되자 감격에 사로잡힌 것이었다.
당시 76세였던 타무라 박사는 뇌졸중으로 반신불수가 되어 거동이 불편했는데도 나의 연구 발표를 듣기 위해 직접 학회장에 나왔던 것이다. 그 다음날 나는 타무라 박사의 집으로 초대됐다.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곱게 차려입은 할머니 한 분이 나를 향해 고개를 묻고 정중하게 엎드려 일본식으로 큰절을 올리는 것이 아닌가. 바로 타무라 박사의 부인이었다. 그녀는 차를 대접하면서도 결코 일어서지 않고 무릎을 꿇고 앉은걸음으로 한참 연하인 내게 다가와 시종 고개를 숙인 채 정중하게 차를 따랐다. 이런 일본식 의식에 서툰 나는 몸 둘 바를 몰라 당황했다.
남편의 숙원을 해결한 은인으로 대접한 것이었다. 한편으론 기분이 좋았지만 다른 한편으론 보은에 무섭도록 철저한 일본인의 심성을 피부로 절감할 수 있었다. 나는 그 집을 나올 때까지 부인의 얼굴을 한 번도 바로 보지 못했다. 그녀는 천생 옛날의 일본여인이었던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