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을 좋아하는 애기가들이 즐겨 쓰는 ‘손바람을 일으킨다’란 표현이 있다. 판세가 좋다 보면 깊은 수 읽기를 하지 않고도 감각에 의존해 호쾌하게 돌을 놓는 행위를 말한다. 1970년대 말 한탄바이러스 발견으로 한창 주가를 올리던 나도 학자로서 손바람을 일으키지 않았나 싶다. 그러나 손바람은 결국 패착을 낳는 법, 나도 한 차례 낙마한 경험이 있다.
캐나다 국립수의학연구소에 근무하고 있던 조 모 박사가 1979년 나의 연구실에서 같이 일하고 싶다고 제안했다. 조 박사는 밍크에 치명적인 뇌염을 일으키는 슬로우바이러스를 세계 최초로 전자현미경 아래서 사진 촬영한 유능한 바이러스학자이며 전자현미경 전문가였다. 그러한 그가 내가 발견한 한탄바이러스를 전자현미경으로 촬영해 보자며 공동 연구를 제의한 것이다.
별도의 연구비를 받지 않고 한 달간 서울에 머물며 나의 연구를 돕겠다고 하니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한 달간의 연구에도 불구하고 한탄바이러스는 전자현미경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 후에도 공동 연구는 계속되었고 캐나다로 돌아간 그가 원숭이콩팥세포 배양에서 한탄바이러스로 의심되는, 지금까지 보지 못한 바이러스 입자가 전자현미경에서 관찰된다는 소식을 전해 왔다.
아무래도 미심쩍은 생각이 든 나는, 유행성출혈열 환자의 혈청과 정상인의 혈청을 맹검용으로 번호를 매긴 후 그에게 보내면서 각각 따로 실험해 볼 것을 권유했다. 만일 그것이 한탄바이러스가 맞다면 환자의 샘플에서만 반응을 일으키고 정상인의 혈청에선 반응을 일으키지 않아야 했기 때문이다.
그가 촬영해 보니 두 그룹 모두에서 유행성출혈열 바이러스로 의심되는 입자가 촬영되었다고 한다. 나는 그렇다면 사실이 아닐 확률이 높으므로 조금 더 조사해 보자고 했으나 조박사와 그의 상사인 연구소장은 한탄바이러스가 틀림이 없을 것 같은데 서둘러 발표하자고 주장했다. 반신반의하던 우리를 서두르게 한 것은 다른 연구진의 발표였다.
미국국립보건원의 노벨상 수상자 가이듀섹 박사팀이 우리가 찍은 바이러스의 모양과 동일한 전자현미경 사진을 미국 학회에서 발표했던 것이다. 물론 그는 그것의 정체가 유행성출혈열 바이러스임에 틀림이 없다고 했다.
1980년 9월엔 일본 토호쿠(東北)의대 이시다(石田) 교수팀이 아예 유행성출혈열 바이러스란 이름까지 붙인 전자현미경 사진을 불란서 스티스버구에서 개최된 국제학회의 포스터전시장에 내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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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8년 우리와 연구경쟁을 벌였던 도후쿠 의대 이시다 교수와 그의 교실원들과 함께 센다이에서 찍은 사진 / 왼쪽에 서 있는 사람이 우메나이 교수, 오른쪽 앞에 앉은 사람이 센다이바이러스를 발견한 이시다 교수, 그 옆이 필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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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터는 흔히 완성된 논문이 아니라 중간 연구 결과를 요약해 포스터처럼 만들어 학회장에 전시하는 경우가 많다. 논문 발표까진 더 많은 검증이 필요한 중간 발표라고 할 수도 있다. 학문의 세계는 냉혹하기 짝이 없기 때문에 하루라도 늦게 논문을 학술지에 내면 창의성을 잃게 되고 낙후자가 된다. 우리는 자연 초조해졌다. 특히 조 박사는 나를 조르다시피 해서 논문을 학술지에 내자고 우겼다.
이렇게 해서 유행성출혈열 바이러스를 전자현미경으로 촬영하는데 성공했다는 논문이 조박사와 나의 이름으로 저명한 의학잡지 「랜시트」에 게재된다. 이렇게 되자 미국국립보건원과 일본 토호쿠의대 팀은 당황했다. 그들도 아직 확실한 증거를 찾지 못했는데 우리가 먼저 성공을 발표했기 때문이다. 그들과의 경쟁에서 이겼다는 기쁨도 있었지만 나는 내심 불안했다. 환자와 정상인의 샘플 실험을 통해 전자현미경에 나타난 바이러스 입자가 유행성출혈열 환자혈청이란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수개월 뒤 미국육군의학전염병연구소 연구진이 나의 이름을 공동 저자로 한 우리의 연구 결과가 의심스럽다는 논문을 발표했다. 우리 전자현미경에 나온 바이러스 입자는 유행성출혈열 바이러스가 아닌 레오바이러스와 유사하다는 것이 아닌가.
레오바이러스에 대한 항체는 한국인 혈청 98%에서 양성으로 나오며, 이 바이러스는 전 세계의 쥐와 사람에 흔한 바이러스다. 이 무슨 실수인가 싶었다. 연구를 담당한 제1저자는 조박사였지만 공동 연구를 한 최종 저자(last author)는 바로 나였기 때문이다. 이 연구 결과는 미군연구소에서 얻은 원숭이 콩팥세포가 레오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있었기 때문으로 판명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