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무렵 내가 관심을 갖게 된 분야는 세균전이다. 한탄바이러스는 공기로 전염되므로 급속히 확산될 수 있는데다 치명적인 독성마저 있으므로 세균전의 소재로 가장 적당했기 때문이다. 1970년대 말 내 연구 결과가 공개되면서 물 밑에 감춰졌던 일본 세균전 부대의 연구 결과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대표 사례가 인간 마루타와 세균전 부대로 악명 높은 만주 하얼빈 근교에 있었던 일본 관동군 731부대다. 1936년 설립된 이 부대의 사령관은 이시이(石井) 중장(中將)으로 그는 쿄토(京都)대의대를 졸업한 우수한 세균학 박사였다. 그는 1930년대 초 유럽 시찰을 통해 서구의 발달된 세균학과 생화학무기연구를 직접 보고 이를 바탕으로 세균전부대 창설과 세균전 무기 개발에 대한 전략을 세웠다.
그의 뒤를 이어 구체적으로 유행성출혈열의 인체실험을 한 사람이 2대 사령관 키타노(北野) 중장이었다. 키타노 중장 밑에서 유행성출혈열 연구를 책임 진 사람이 카사하라(笠原) 박사다. 카사하라는 1930년대 일본뇌염 바이러스를 세계 최초로 환자에게 분리해 낸 뛰어난 학자였다. 당시 일본은 전시동원체제로 모든 자원을 전쟁에 이용했던 전시였으므로 그 역시 군대에 동원되어 731부대로 차출되었던 것이다. 일본 패망 직전인 1945년 8월 초 이들은 731부대를 완전히 파괴하고 일본으로 귀국해 잠적했으며 일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러나 내게 뜻하지 않은 기회가 찾아왔다. 1977년 9월 나와 친한 일본국립보건원 바이러스부장 오야(大矢) 박사가 편지를 보내왔다.
내가 유행성출혈열은 진드기에 물려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공기를 통해 호흡기로 전염된다고 발표했던 것에 대해 키타노 중장이 반박하고 있으며, 나를 만나자는 내용이었다. 토쿄대의대 출신인 오야 박사의 동창 중에 731부대의 2대 사령관인 키타노 중장의 아들이 있는데 그의 아버지가 나의 연구 결과에 대해 이견을 제시했다는 것이었다.
731부대 연구진이 등줄쥐에서 채집한 진드기를 갈아 주사기로 원숭이 피부에 주사했더니 원숭이들이 모두 유행성출혈열에 걸렸으므로 공기감염이란 내 주장은 틀렸다는 것이다. 이는 내 연구 결과와 일치하지 않은 것으로 나도 그들의 과거 연구가 몹시 궁금했다. 처음에는 내가 그의 면담을 거절했다. 이유는 악독한 전범자와 만나는 것이 꺼림칙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 후 그의 연구 경험이 더욱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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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얼빈 일본관동군 인간생체시험장 731부대 / 중국 헤이룽장성 하얼빈. 제2차세계대전 중 일본 관동군이 생체실험을 하던 부대. 살아있는 사람을 대상으로 탄저균, 페스트 등 세균실험을 자행한 곳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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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를 직접 만나기 위해 여러 경로로 문의했으나 실패했다. 1980년 당시 그는 이미 87세의 고령인데다 일본은 좌파운동이 극렬했던 때라 공개적으로 모습을 드러낼 경우 세균전의 주역으로 테러를 당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우연히 1981년 카사하라 박사를 만나게 된다. 일본 토쿄에 있는 키타사토(北里)연구소의 바이러스연구부장인 마키노(牧野) 박사가 주선했다. 카사하라 박사가 내게 할 말이 있다는 것이 아닌가. 키타사토연구소는 일본 최고의 미생물연구소로 일본 미생물학의 태두인 키타사토 박사가 1920년대에 직접 설립한 것이다.
키타사토 박사는 19세기 말 독일로 건너가 당시 파스퇴르와 함께 세계 미생물학의 양대 거두로 추앙받는 코흐 박사의 문하생으로 들어간다. 코흐 박사는 결핵균과 콜레라균을 발견한 당시 최고의 미생물학자였다. 키타사토는 코흐 박사 아래서 디프테리아와 파상풍균의 독소를 중화시키는 항독소를 개발해 내는 뛰어난 업적을 남기고 귀국 후 키타사토연구소를 세우게 된다.
키타사토연구소를 구경하였을 때 제일 인상 깊었던 것은 연구소 뒷마당 한 구석에 설치된 신사(神社)였다. 죽은 자의 영혼을 추앙하는 일본식 신사의 주인공은 바로 스승인 코흐 박사였다.
생전 키타사토는 매일 이곳 신사를 찾아 자신의 스승을 기리는 참배를 했다는 것이 아닌가. 아이러니는 세균전의 주역인 731부대의 키타노 사령관과 카사하라 박사는 모두 키타사토의 학맥을 이어받은 미생물학자란 점이다.
이들은 모두 용서받을 수 없는 죄악을 저질렀음에도 당시 세균전 연구 결과를 전부 미군에 넘김으로써 군사재판에 회부되지 않는 특혜를 얻을 수 있었다. 카사하라 박사는 그들의 연구대장쯤 되는 핵심 브레인이었던 것이다. 비장한 심정으로 만난 카사하라 박사는 내게 뜻밖의 소릴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