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노미터(1나노미터는 10억분의 1미터)의 소립자에서 광년(빛이 1년 동안 달려야 도달하는 거리)의 은하계까지 물질계에 대해선 속속들이 꿰뚫고 있는 과학기술이 왜 사람의 몸에 대해선 아직도 그토록 무지한 것일까. 첨단의학도 감기 하나 제대로 치료하지 못하고 있다. 가장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사람은 물질과 달리 연구자가 사람을 실험동물로 마음대로 사용할 수 없다는 점에 있다.
물론 인도적이며 윤리적인 이유 때문이다 쥐도 실험에 사용할 땐 매년 연구실에서 위령제를 지낼 정도로 연구자의 마음은 개운치 않으니 사람이야 오죽하겠는가. 그러나 과학자가 인체실험을 마음대로 할 수 있다면 의학은 지금과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발전할 것이다. 극악무도한 일본군 731세균전부대의 인체실험도 전쟁을 이기기 위한 이러한 배경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나는 1989년 10월 세계보건기구의 유행성출혈열 자문관 자격으로 출혈열 환자가 많은 중국의 하얼빈 시를 방문한 적이 있다. 이곳은 매년 8천여 명의 유행성출혈열 환자가 발생해 나의 도움을 요청했던 것이다.
나는 그곳 해룡성 위생국장의 안내로 악명 높은 일본 731부대가 있던 핑팡(平房)이란 곳을 돌아볼 기회를 가졌다. 그 부대의 시설은 상상 외로 거대한 규모였다. 비행장과 철도가 깔려 있었고 수만 평의 야외실험장도 있었으며 상주 연구 인원만 2천 명을 넘었다고 한다.
1997년 골드란ㄴ 미국인 작가가 쓰고 미국에서 출판된 『731부대의 진상』이라는 책에 따르면 731부대에서 희생된 중국인 인간 마루타가 무려 3천여 명이 되었다고 한다. 1947년 미국육군조사관 힐 중령이 토쿄에서 작성한 731부대에 관한 보고서에 따르면 1936년부터 1943년까지 731부대에서 만든 인체표본만 해도 페스트 2백46개, 콜레라 1백35개, 유행성출혈열 1백1개에 이른다.
|
|
| ▲ 1989년 중국 하얼빈 일본군 세균전 731부대 유적지를 찾은 뒤 중국학자들과 찍은 사진/ 왼쪽에서 3번째가 필자이고 4번째가 필자의 처, 5번째가 손간 교수 |
|
패전 직전 731부대 제2대 사령관이었던 키타노 중장은 일본 정부가 만주 수도 신징(新京) 시에 세운 만주의대 교수로 위장근무하면서 731부대의 연구를 대학에서 지원했다고까지 했다.
나는 중국 정부가 731부대 건물 안에 만든 작은 기념박물관을 보고 나오면서 현관에 있던 방명록에 ‘천인공노(天人共怒)’라고 썼다. 위생국장이 한마디 쓰라고 부탁해서 쓴 것인데 나도 모르게 그런 말이 떠오른 것이다. 내가 같은 미생물학자였다는 사실이 부끄럽고 미워지는 순간이었다. 또 동행했던 중국 보건요원과 미생물학자들의 눈이 마주치면서 억울하게 죽어 간 애국자들의 비통한 모습이 떠올라서인지 함께 눈시울이 붉어지고 말았다.
내가 발견한 한탄바이러스는 세균전 무기로는 안성맞춤이었다. 쥐의 배설물을 통해 공기로 전염되므로 급속히 퍼질 수 있는데다 치료제도 없으며 높은 치사율을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한탄바이러스를 다룬 영화가 최근 미국에서 많이 제작됐다.
우리나라에서 만든 영화 ‘마루타’와 베스트셀러 소설을 영화로 만든 미국의 ‘아웃 브레이크’, 공상과학영화 ‘엑스파일’이 바로 그런 것이다. 영화를 만들 무렵 중국이나 한국에서나 유행하는 풍토병인 줄 알았던 한타바이러스가 미국과 남미에서도 우연히 유행했는데 할리우드의 천재적인 영화감독들이 때를 놓치지 않고 일제히 이를 영화하한 것이다.
더스틴 호프만이 주연을 맡아 국내에도 개봉된 ‘아웃 브레이크’는 바이러스가 순식간에 한 마을을 초토화시킬 수 있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 준다. ‘엑스파일’은 외계인이 한탄바이러스를 세균전으로 사용한다는 내용이다. ‘마루타’는 일본군 731부대에서 죄 없는 인간에게 잔인무도하게 세균 실험을 하면서 사람을 토막 내는 사실을 다룬 한국영화다.
비록 영화에선 한탄바이러스란 종(種)의 이름이 아니라 상위개념인 한타바이러스란 속(屬)명으로 언급되긴 했지만 한타 역시 한탄이란 이름에서 비롯된 것은 물론이다.
독자 여러분도 혹시 영화를 보게 된다면 영화 속에서 언급된 한타바이러스가 한국인 과학자가 발견해 붙인 이름이란 사실을 상기해 주기 바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