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영어 (제4화)

영어를 못해 생긴 미국 유학시절 에피소드는 지금도 기억에 선하다.

미국에 간지 1년 정도 지나 금발의 미국인 여학생을 사귀게 됐다. 부친이 피아니스트인 메리라는 미생물학도로 대학원 수업을 같이 듣게 되면서 알게 되었다.

당시만 해도 시골에 사는 미국인에게 동양인은 생소한 존재였다. 어쩌다 미니애폴리스 시내 백화점에서 물건을 고르면 옆에 있던 여인네들이 마치 못볼 것을 본 듯 화들짝 놀라 달아나곤 했을 정도였으니까.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일본인에 대한 감정이 극히 좋지 않은 때라 한국인 동료들과 저녁에 맥주 집에서 맥주라도 마시고 있으면 “잽스(일본인을 낮춰 부르는 속어)”라고 비아냥거리는 백인들의 목소리가 귓전을 때리곤 했다.

그러나 메리와 나는 서로를 집으로 초대할 정도로 친한 급우가 되었다. 문제는 나의 영어 실력이었다. 한번은 수요일 날인가 메리가 ‘nest sunday'에 자기 집으로 초대하겠다고 말했다. 나는 이를 문자 그대로 해석해 ’다음 수요일‘로 이해하고 3일 후 다가오는 이른바 ’이번 두 일요일‘은 생각도 하지 못했다.

마음 놓고 일요일 아침에 소아과를 하는 홍창의 교수와 같이 교회에 다녀왔더니, 당시 한 방에서 같이 자취를 했던 해부학의 김제남이 말하길 메리가 집에 찾아와 시간이나 기다리다 갔다는 것이 아닌가.

알고 봤더니 영어로 ‘nest sunday'는 통상 바로 다가오는 일요일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이처럼 서투른 영어로 불필요한 오해를 한 데다 동양식 여필종부(女必從夫) 등 문화적 배경의 차이로 메리와 나는 점차 멀어지게 되었다.

이런 일도 있었다. 당시 미네소타 대학엔 우리 조교들뿐 아니라 나보다 7년 선배이며, 서울대 총장과 보사부 장관을 지낸 권이혁 교수도 보건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밟고 있었다. 권 교수는 서울 의대 졸업 후 경기도 연천 시에 있는 미군 제9군단 민간인 구호병원에서 원장으로 근무하다 한미재단 후원으로 도미한 탓인지 영어 실력이 상당히 유창해 보였다.

▲ 1956년 미네소타 대학에서 연수 중인 서울대 의대 교수들 / 됫줄 왼쪽부터 백만기, 신보선, 임정규, 김철, 한삼석, 미상, 이진순, 전종휘 교수. 앞줄 왼쪽부터 이승훈, 남기용, 나, 김주완, 홍창의, 김재남 교수

모두가 꿀 먹은 벙어리 모양 가만히 있을 때도 권 교수는 미국인들과 당당히 대화에 끼어들어 우리를 기죽이곤 했다. 권 교수와 나는 예방의학과 역학(疫學) 과목을 같이 수강했다. 이 강좌엔 모두 30명이 수강했는데 나와 권 교수 외에 일본인, 중국인, 인도인과 파키스탄인이 한 명씩 있었다.

어느 날 역학 강의 시간에 강의실에 들어가 보니 나와 권 교수, 그리고 일본인 외에 아무도 없었다. 약 10분이 지나도 교수는 물론 다른 학생들도 나타나지 않았다. 무엇인가 이상하다고 느껴 부리나케 교무실에 달려가 알아보니 글쎄, 담당교수의 해외학회 출석으로 휴강이라지 않는가.

바로 전 주의 강의 때 교수가 분명히 휴강을 할 거라고 말했고 인도인과 중국인을 포함해 모두 알아들었는데, 유창한 영어 실력을 자랑하는 권 교수를 포함해 우리 세 명만이 못알아 들었다니 지금 생각해도 웃음이 나온다.

‘하이’ 이야기도 있다. 이상하게도 그 당시 영어사전엔 미국인들이 잘 쓰는 인사말인 ‘Hi'가 없었다. 식자층이랄 수 있는 우리 일행도 책에 쓰여 진 ’Hi'를 ‘히’로 발음하거나 인사말이 아닌 웃음을 묘사하는 의성어쯤으로 알고 있을 정도였다.

어느 날 동료 조교인 약리학의 임정규가 우리에게 하소연했다. 서울대 약리학 교실에서 자신의 스승인 오진섭 주임교수가 미네소타 대학으로 왔는데, 복도에서 오 교수를 만난 자리에서 요 교수 뒤를 따라오던 미국인 학생에게 ‘하이’라고 인사한 것이 문제가 됐다는 것이다.

오 교수는 뒤따라오는 학생을 보지 못했기에, 한참 제자인 임정규가 자신에게 손을 치켜들며 ‘하이’라고 외쳤다고 매우 건방진 놈이라며 두고두고 불쾌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미국에 오더니 상하 구별이 없어졌다고 욕한다는 것이다.

당시 의과대학에선 사제 간에 엄격히 도제문화가 있어 스승에게 건방지다는 얘기를 듣는 것은 치명적이고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나중에 오 교수가 말하길 ‘헬로’가 스승에게 하는 점잖은 인사이며 ‘하이’는 동료나 후배에게 하는 속된 인사라고 알고 있었다는 것이 아닌가.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는 점잖은 사람이 있는지는 모른다. 아니, 오 교수의 생각이 옳을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