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해 가을 나는 일본 문부성으로부터 VIP로 정식초청을 받았다. 일본인 교수들에게 유행성출혈열에 대한 지식을 아낌없이 전수한 공로와 일본에서 유행성출혈열의 보균동물을 규명하고 예방 대책을 세워 준 공로를 인정하여 국빈 자격으로 일본을 방문하게 됐다.
일등석 비행기표에다 공항에선 일본 외무성과 문부성 의전관리들의 영접까지 받았다. 숙소도 토쿄 최고의 뉴오타니 호텔이었다. 약 1주일간 일본의 6개 대학병원과 지방대학을 시찰하고 강연을 마친 후 나는 토쿄에 있는 주일 한국대사관을 찾아갔다.
그런데 이곳에서 나는 엉뚱한 경험을 해야 했다. 당시 한국대사관엔 교육부에서 파견된 장학관이라는 고위공무원이 있었는데, 그는 나를 만나자마자 나에게 “왜 하필 이 무서운 질병 이름을 ‘한국형출혈열’이라고 명명했느냐“는 것이 아닌가.
이유인즉 안 그래도 일본에서 한국인의 위상이 떨어져 있는데 사람의 생명을 빼앗는 괴질의 이름에까지 ‘한국’이란 국호를 삽입한 것은 국익에 도움이 안 된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한국의 대외 이미지를 떨어뜨린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그만 어처구니가 없어졌다. 그것은 정치적 해석이며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소리였기 때문이다.
질병의 이름은 언제나 첫 발견자나 해당 질병의 분야에서 가장 업적이 뛰어난 학자만이 붙일 수 있다.
그리고 첫 발견자는 대개 자신의 이름이나 자기 나라를 상징할 수 있는 이름을 붙인다. 그것은 그 나라의 과학자가 그 질환에 대해 가장 공로가 많았음을 대대손손 알릴 수 있는 애국심의 발로인 것이다.
예컨대 비록 세균전의 원흉이었지만 일본의 카사하라 박사가 일본뇌염의 원인 바이러스를 발견한 뒤 붙인 이름이 일본뇌염바이러스(Japanese encephalitis virus)가 됐다. 일본뇌염은 무서운 병이지만 일본 의사가 처음 발견했다고 하여 붙인 자랑스러운 이름인 것이다.
뇌염은 유행성출혈열보다 훨씬 치명적인 질환이다. 그러나 일본이란 이름이 붙었다고 해서 아무도 일본을 흉보는 사람은 없다. 오히려 일본뇌염을 처음 기술한 일본인의 공적을 기릴 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