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문의 발전을 위해선 국가 간 협조가 긴요할 때가 있다. 독불장군처럼 혼자 힘으로 모든 연구를 도맡아 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에도 요령이 필요하다. 협조에 인색해선 곤란하지만 짝사랑식 일방적 협조도 좋지 않기 때문이다.
일본과 중국 등 동양권 학자와의 공동 연구와 협조는 생각보다 쉽게 이뤄졌다. 원하는 혈청을 말만 하면 신속하게 보내 줬다. 심지어 1979년 일본 와카야마(和歌山)의대는 40년 전에 만주에서 유행성출혈열에 걸렸던 일본군 군의관의 혈청까지 구해서 보냈다.
조사해 보니 한탄바이러스에 대한 항체가 높게 나왔다. 덕분에 우린 유행성출혈열 항체가 평생 지속되는 이른바 종신면역을 지닌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밝혀내게 됐다.
그러나 일본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정직하지 않은 국가라는 사실도 깨달았다. 연구엔 협조적이었지만 결과는 철저하게 은폐하려 들었다. 필자의 연구로 일본 29개 연구소와 대학병원에서 1백39명의 유행성출혈열 환자가 발생했다는 사실이 이미 밝혀졌음에도 불구하고 일본보건성은 ‘일본엔 유행성출혈열이 없다’고 감추기에 급급했다. 내부적으론 유행성출혈열 대책반을 만들어 한국에 보내고 일본에서도 내사를 벌이고 있었음에도 그랬다.
홍콩 정부도 마찬가지였다. 필자는 홍콩 집쥐 4마리 중 1마리가 서울바이러스에 감염됐으며 10여 명의 환자도 발생했다는 사실을 1985년 밝힌 바 있다. 그러나 홍콩 당국은 내게 이 사실을 발표하지 말아 달라고 요청했다. 이유는 관광 수입이 격감하는데다 무역선 영업에도 차질을 빚는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동양권 국가에 비해 미국 등 서구인 학자들은 연구 결과 발표에 불필요한 제동을 걸지 않았다. 자유로운 학문 교류가 이뤄진다는 점에선 돋보인다. 그러나 그들은 친절해 보이는 겉보기와 달리 연구재료를 주거나 연구 결과를 발표하는 논문에 우리 이름을 넣는데 매우 비협조적이었다.
1950년대 말 미국 유학시절 필자는 돼지 콩팥에서 일본뇌염바이러스를 세계 최초로 배양하는 데 성공하여 탁월한 실력을 과시했다. 동료들이 번번이 조직배양에 실패한 것을 나는 거뜬히 해낸 것이다. 섬세한 동양인 특유의 손기술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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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8년 유행성출혈열 환자를 확인하기 위해 스리랑카를 찾은 필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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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미국인 교수는 내게 “너만 아는 비결을 혼자 갖지 말고 공개하라”며 압력을 가했다. 그러면서 “동양인은 특별한 기술을 자기만 알고 후학에게 전수하지 않아 그 사람이 죽으면 비법이 사장되기 일쑤”라고 비난하는 것이 아닌가. 나로선 터무니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그런 식으로 따지면 서구인들이야말로 연구 성과를 나누는 일에 더욱 인색하였다.
나는 1993년 미국 인디언들에게 한타바이러스 폐증후군이 발생했을 때 연구를 위해 환자의 혈청을 요청한 바 있다. 그러나 환자 혈청을 관장하던 미국질병예방통제센터(CDC)는 이를 완곡하게 거절했다. 처음엔 혈청이 없다고 했다가 거짓임이 밝혀지자 나중에 보내겠다고 하면서 차일피일 미뤘다. 필자는 끝내 혈청을 받지 못했다.
미국인들은 매우 친절하며, 항상 얼굴에 미소를 머금고 다닌다. 그러나 이해타산이 걸리니 연구에 있어선 냉혹하기 짝이 없다. 더치계의 사람들은 오죽하면 부자간에도 식당에서 각자가 먹은 음식 값을 각각 낸다고 하지 않는가. 나는 지금도 후학들에게 미국인과 공동 연구를 할 때는 절대 비장의 무기를 함부로 꺼내선 안 된다고 충고하고 싶다. 그들은 우리에게 낡은 것을 줄 때는 후하다. 그러나 자신의 경쟁력이 위협받는다고 느끼는 존재에 대해선 철저하게 경계한다.
여러 가지 난관에도 불구하고 필자의 유행성출혈열에 관한 국제공동 연구는 순풍에 돛 단 듯 진행되었다. 미국과 일본은 물론 스리랑카와 아르헨티나, 이집트, 그리스, 러시아 등 세계 곳곳에 필자가 가보지 않은 국가가 거의 없을 정도였다. 이들 국가 모두에서 유행성출혈열 바이러스와 환자가 발견됐다. 물론 필자의 연구 기술과 혈청검사 덕분이다.
이로써 유행성출혈열은 일본, 중국, 러시아나 한국과 같이 아시아 지역에서만 유행하는 토착질환이 아니라 열대지방의 섬나라와 아메리카 대륙까지 망라하는 전 지구적인 전염성 질환임이 우리 손으로 입증된 셈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