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세계적으로 유행성출혈열의 본거지이고 가장 극성을 부리는 나라는 중국이다. 전국 규모의 정확한 통계에 의하면 1년에 약 15만 명의 환자가 발생하고 수천 명이 사망한다. 관광 명소로 알려진 시안(西安) 시가 있는 한 개 성에서만 해마다 2만여 명의 환자가 발생할 정도니 그 규모를 짐작할 만하다.
1978년 필자가 유행성출혈열 바이러스를 발견한 직후 내게 연구비를 지원한 미국육군전염병연구소는 당시 중국에서 유행성출혈열 바이러스와 항혈청을 달라는 요청이 들어왔으니 나에게 바이러스를 주라고 설득했다. 해마다 수십만 명의 환자가 발생하는 중국으로선 유행성출혈열의 진단과 치료가 절박한 과제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존심이 강하고, 6·25때 중공군과 싸운 나는 중국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아 이를 거절했다.
하지만 무슨 까닭인지 미국은 필자의 허락 없이 1980년 내가 준 바이러스를 중국에 넘겨주었다. 닉슨 미국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하며 벌였던 핑퐁외교 때문이라고 들었다. 보통 새로운 미생물을 발견한 학자는 자기 일이 끝날 때까지 미생물을 남에게 분양하지 않는다. 그러나 공동 연구 목적으로 분양해 줄 때는 분양받은 사람에게 발견자의 허락 없이 다른 사람에게 미생물을 줄 수 없다는 동의서를 받는다.
이 일로 중국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을 지녔던 필자는 세계보건기구의 주선으로 중국을 방문하게 됐다. 1982년 토쿄에서 세계보건기구 전문가회의가 열렸는데 이곳에서 중국인 학자를 만난 후 초청을 받은 것이다. 당시는 냉전시대였고 중국은 적성국가였으므로 국교가 없어 정식 절차를 밟아선 입국이 불가능했다. 세계보건기구 사무총장이었던 일본의 나카지마(中島)박사가 힘을 썼다. 그는 필자에게 한국 여권 대신 세계보건기구가 사용하는 UN외교관 여권을 발급했다.
이렇게 해서 1986년 10월 나는 마닐라를 출발해 중국 베이징에 도착했다. 그들이 원했던 바이러스와 혈청은 물론 새로 개발한 진단용 키트도 가져갔다. 중국국립바이러스연구소가 공식적인 초청자였다. 나는 이들에게 1주일간 유행성출혈열의 연구 노하우를 전수했다.
그런데 어느 날 저녁에 갑자기 북한의 바이러스학자인 김낙제 박사가 필자가 머물고 있는 베이징호텔로 찾아왔다.
그는 과거 두 차례 유고슬라비아와 소련에서 개최된 국제학회에서 만나 서로 안면이 있던 터였다. 그는 당지도원이라고 하는 40대의 건장한 사람과 함께 왔다. 놀랄 만한 내용인즉 북한에 살고 있는 내 누이동생이 베이징에 와 있으니 한번 만나보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필자보다 6세 어린 누이동생은 한국전쟁 때 월남하지 못하고 북에 머무르고 있던 터였다. 갑작스런 제의라 나와 같이 간 아내는 기겁을 하였으나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
|
| ▲ 서안에 있는 중국 해방군 제4육군군의대학 객좌교수로 추대 됨. 중앙에 필자, 그 뒤 키 큰 군인이 학장으로 육군 중장 |
|
다음날 저녁 약속대로 내 호텔 방에서 누이동생을 만났다. 약 40년 전 필자의 부친이 환갑 때 찍은 가족사진을 증거물로 갖고 왔다. 헤어진 지 37년이란 세월이 흘렀지만 대번 동생인 줄 알아볼 수 있었다. 쪼글쪼글 늙어 보이는 것이 안타까웠다. 누이는 제법 근사한 손목시계를 차고 왔는데 도청장치라도 있나 싶어 풀어봤더니 고장 난 시계가 아닌가. 나는 옆에 있던 아내의 손목시계를 풀어 누이동생에게 줬다.
동생은 1960년에 인민군 군관과 결혼했는데 2남 2녀를 낳고 비교적 유복하게 살고 있다고 했다. 그러나 몹시 불안에 떨고 있는 모습이었다. 정치적 이야기는 일절 배제하고 가족 소식과 덕담만을 나누었다.
헤어질 무렵 누이동생은 내게 북한에 한번 가보지 않겠느냐고 제의했다. 심양에 북한 영사관이 있는데 그곳에서 북한 여권을 발급받은 뒤 2~3일만 평양을 둘러보고 가라는 것이었다. 분명 정치적 의도가 숨어 있음이 틀림없었다. 나는 중국 정부와 한국 정부의 허락 없이는 갈 수 없다고 완곡하게 거절했다. 동생은 그렇다면 지도원에게 “수령님 덕분으로 동생을 만날 수 있어 고맙다”란 말이라도 해 달라고 부탁하는 것이었다. 내가 잘못하면 동생에게 피해가 돌아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날 북한에서 온 당 지도원을 만난 필자는 “나는 중국 정부의 정식 초청을 받은 인사이니 나의 북한 방문을 비밀리에 획책한다면 중국과 심각한 외교적 마찰을 빚게 될 것”이라고 일단 으름장부터 놨다. 그랬더니 그는 갑자기 없던 일로 하고 후에 좋은 기회가 있으면 와 달라는 말로 태도를 바꿨다.
그에게 누이동생이 시키는 대로 정중하게 고맙다는 말을 덧붙였다. 그러자 심각하게 굳어져 있던 그의 표정이 대번 풀어지면서 만족해했다. 갈라질 대로 갈라진 남과 북의 차이를 몸소 체험한 순간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