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가 많은 역질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예방백신과 항생제 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 예방백신이 방패라면 항생제는 창에 비유된다. 둘 다 중요하지만 굳이 비교한다면 백신이 항생제보다 훨씬 중요하다. 예방이 치료보다 중요하기 때문이다.
지구상에서의 천연두의 박멸도 항생제보다 예방백신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한탄바이러스를 발견한 필자가 예방백신 개발에 매들린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출혈열 환자뿐만 아니라 연구소에서 연구하는 사람들이 병에 걸리니 이들을 보호해야 할 책임을 느꼈던 것이다.
처음엔 소아마비 생백신처럼 바이러스의 병원성을 약하게 만든 생백신의 개발을 시도했다. 그러나 생백신은 바이러스를 완전히 죽인 사백신과 달리 효능은 뛰어난 반면 부작용이 있을 수 있고 또 한국에서는 생백신을 허가해 준 일이 없었기 때문에 도중에서 포기했다. 그래서 1985년 다소 효과는 떨어지지만 안전성이 뛰어난 사백신을 만들기로 연구 방향을 바꿨다.
문제는 연구비였다. 다른 일엔 협조적인 미육군의학연구소가 백신 개발 연구비만은 끝까지 지원할 수 없다고 했다. 자기들이 하겠다는 것이다. 바이러스 발견은 나에게 뒤졌지만 군사적으로 중요한 질병인 만큼 황금알을 낳는 백신 개발은 미국육군이 해야 한다고 행각했기 때문이다.
다행히 나는 WHO에서 백신 연구비를 2년간 받았고, 1986년에 국내 백신제조회사인 녹십자사가 연구비를 지원했으며 안창남 연구원이 연구에 합세하였다. 이미 녹십자사는 서울대의대 김정룡 교수와 함께 B형 간염 예방백신을 개발한 경험이 있었다. 이때부터 우리는 백신 개발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으며, 나는 일본뇌염 백신 제조 경험을 살리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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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9년 우행성출혈열 예방백신을 필자(왼쪽)가 허영섭 당시 녹십자 대표에게 조사하고 있는 모습. 오른쪽 두 번째가 안창남 박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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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신을 개발하려면 일단 바이러스를 대량 증식하는 기법을 찾아야 한다. 이를 위해 우리는 쥐의 뇌조직을 이용하는 일본뇌염예방백신 제조 기법을 응용했다. 신기하게도 한탄바이러스는 태어난 지 24시간 이내의 흰쥐 뇌조직에서만 대량 증식이 가능했다. 단 하루만 지나도 바이러스는 자라지 않았다. 태어난 지 24시간 이내의 흰쥐의 뇌는 불과 0.1g밖에 되지 않았지만 바이러스를 대량 증식시킬 수 있는 방법을 알아낸 것은 큰 수확이었다.
이렇게 대량 증식한 바이러스를 특수한 방법으로 불순물을 제거한 후 0.05% 포르말린으로 영상 4도의 온도에서 2주일 동안 처리해 죽이는 과정을 거쳤다. 문제는 이렇게 개발된 바이러스 항원의 단백질이 인체 내에서 적절한 면역성을 지녀야 한다는 것이었다. 항원의 순도가 낮으면 부작용을 낳고 항원성이 너무 낮으면 항체 생성 등 예방 효과가 낮게 되어 이른바 물백신이 나오기 때문이다.
당시엔 몹시 골머리를 앓았지만 면역성 정도를 놓고 줄다리기를 벌이는 백신 제조 과정은 가히 예술적이라 할 만했다. 여러 차례 실패를 거듭한 끝에 1988년 11월 우리는 세계에서 처음으로 효과가 탁월한 유행성출혈열 예방백신을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이 성공은 모두 동물실험에서 거둔 것이었다. 실제로 백신이 효과가 있는지 없는지 사람을 대상으로 임상시험을 해봐야 했다. 그러나 누가 제일 먼저 맞을 것인가. 역사적 관례에 따라 백신을 만든 필자가 나설 수밖에 없었다.
1988년 12월, 필자가 맞은 다음 백낙주 조교 등 연구진 7명이 모두 자진해서 백신을 처음 맞았다. 그러나 일부 연구원은 백신접종을 거부했다. 다행히 주사 후 특별한 부작용이 없었으며 한 달 후 이들 모두에게서 항체가 생겼으며, 2차 접종을 했다. 하지만 7명만으론 객관성을 입증받기는 어렵다. 이번엔 제약회사가 나섰다. 1989년 2월 녹십자사의 허영섭 사장 등 30명의 직원들이 자진하여 임상시험에 참여했다. 28명에게서 항체가 생겼다.
항체 형성에 실패한 2명에 대해 원인을 따져 봤다. 1명은 남자 술꾼이고 1명은 위장이 약해 수십 년 동안 한약을 복용해 온 여자 환자였다. 이들 두 사람은 술과 약물 장기 복용으로 인체의 면역 기능이 떨어져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었다. 두 차례에 걸친 임상시험이 있었지만 여전히 시판 허가를 받기엔 미흡했다.
하지만 지금도 임상시험에 대해 마루타 인체실험을 연상하여 거부감이 강한 국내 현실에 비추어 볼 때 당시 수백 명의 자원자를 모집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러나 애태우던 우리에게 뜻하지 않았던 행운의 기회가 다가왔다. 주인공은 바로 당시 중앙일보 체육 담당 기자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