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학 당시 우리는 말 그대로 촌놈이었다. 1955년 우리 일행을 태운 비행기는 알레스카의 앵커리지를 경유해 시애틀에 하룻밤 지체했다. 지금처럼 논스톱으로 뉴욕이나 미니애폴리스까지 가는 비행기는 없었다.
공항에 도착해보니 칠흑같이 캄캄한 밤이었는데 미 국무성 관계자들이 나와 우리를 인근 호텔로 안내했다. 호텔에 도착한 우리가 가장 놀란 것은 화장실과 욕실의 수도꼭지에서 김이 모락모락 나는 뜨거운 물이 나오는 것이었다. 수돗물은 항상 차가워야 하는데 웬일인가 싶었다.
수도꼭지가 두 개 있는데 아무 것도 모르고 한 개를 틀었더니 뜨거운 물이 콸콸 쏟아져 나오는 것이 아닌가. 같이 있던 이동식 조교가 놀라서 소리를 질렀다. 우리도 뛰어가 그 장면을 보았다. 나중에야 냉수와 온수 꼭지가 따로 있으며 목욕을 위한 온수란 사실을 알고 우리의 무지에 부끄러워했다. 하긴 서울에선 변변한 상수도조차 없던 시절이 아닌가. 일행 중 마취과 조교인 이동식은 그 모습이 어찌나 신기한 지 연신 수도꼭지에서 나오는 뜨거운 김에 대고 셔터를 터뜨리기도 했다. 그는 지금 그런 미국에서 잘 살고 있다.
이튿날 아침 자고 일어난 우리를 또 한 번 놀라게 한 것은 호텔 앞에 늘어서 있던 자동차 행렬이었다. 지금 기억나는 것은 뷰익 자동차인데 세상에 그렇게 호화롭고 큰 차는 한국에서 본 적이 없었다. 그것도 몇 십 대가 줄지어 서 있다니 정말 장관이 아닐 수 없었다. 말로만 듣던 TV도 호텔에서 처음으로 보았다. 6․25를 겪은 폐허의 땅 한국에서 온 나는 한편으론 기가 죽었지만 낮선 미국 땅에서 마치 희망 찬 신천지에 온 듯한 들뜬 기분을 만끽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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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6년 8월 여름방학 때 옐로스톤 국립공원에서 / 왼쪽부터 해부학 고 김재남조교, 나, 생화학 이진순교수, 생리학 이상돈조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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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라운 일들은 미국에 도착한 지 한참 지나서까지도 계속되었다. 추위로 유명한 미네소타도 한 여름엔 서울보다 더 더웠다. 그런데 미네소타 대학병원 안은 얼음 동굴처럼 시원한 것이 아닌가. 에어컨의 위력을 이때 처음 실감했다. 에어컨이라는 말조차 몰랐고, 일반 가정과 공공기관 어디서든 에어컨이라곤 전무했다. 국내 실정을 감안하면 당연한 일이었다.
일부 제도도 이때 처음 경험했다. 미국에 온지 약 3개월 후, 하루는 미니애폴리스 시내에 있는 데이톤이라는 백화점에서 양복을 사려고 하는데 한 벌에 30달러나 하는 것이 아닌가. 내가 준비해 간 돈은 20달러 남짓이므로 나가려고 하는데 점원이 불러 세우며 지금 구입할 수 있다고 말했다. 한 번에 10달러 씩 3번에 나누어 내면 된다는 가의 설명을 한참만에야 이해할 수 있었으며, 덕분에 미제 양복을 입을 수 있었다.
미네소타 대학에 도착한 우리 일행은 모두 기숙사에 들어갔다. 경비는 전액 미국 정부에서 지원했다. 교수는 매달 2백40달러를 받았지만 나 같은 조교는 1백80달러의 급여를 받았다. 그런데 기숙사비가 1백10달러였으므로 70달러로 한 달을 살아야 했다. 당시 말보로 담배 한 갑이 10센트였으며 자취를 하면 한 달 쌀과 반찬값이 15달러 정도였으니 이 돈도 결코 작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풍족한 편도 아니었다.
우리는 신체검사와 지능검사 등 소정의 절차를 마친 뒤 9월부터 대학원 석사과정에 입학해 미국 유학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미국 북서부에 위치한 미네소타 주는 눈이 많이 내렸지만 우리나라와 기후가 비슷해서 날씨 때문에 겪는 어려움은 없었다. 다만 낮선 문화가 문제였다. 우선 음식이 맞지 않았다. 기숙사에선 우유와 버터 바른 빵과 계란이 나왔다. 나는 특히 고생을 많이 했다. 아침에 우유만 먹으면 하루 종일 속이 부글부글 끓는 소화불량에 시달렸다. 그래서 우유와 버터 바른 빵 대신 항상 과일 주스와 계란만으로 아침식사를 때웠다. 그래선지 힘도 없고 체중도 늘지 않았다.
다행히 저녁엔 스파게티나 감자요리, 핫도그 등을 내놓았는데 그런대로 먹을 만했다. 말도 잘 통하지 않고 식사도 맞지 않는데 이제부터 미국인들과 똑같은 조건에서 대학원 석사과정을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정말 갑갑하기만 했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 1년이 못되어 값비싼 기숙사에서 뛰쳐나와 자취를 시작했다. 당시 대학가 근처의 주택에서 자취하는 데는 한 달에 30달러면 충분했다. 우리는 이렇게 해서 생활비 서너 달 치를 저축할 수 있었으며, 차가 없기 때문에 시내에 쇼핑을 갈 때는 날을 정해 한꺼번에 필요한 물품을 사곤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