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년 겨울 중앙일보 체육 담당 기자가 유행성출혈열에 걸려 연세대학병원 내과에서 사경을 헤매다 살아난 일이 있었다. 그는 발병 열흘 전 수원의 한 골프장에서 골프를 친 일 이외에는 경기도 북부 등 유행성출혈열 환자 유행지역에 간 적이 없었다. 그는 골프장에서 감염되어 입원한 최초의 사례였는데 그는 이 사실을 고백해 왔다.
이 사건이 신문에 크게 터지자 골프장에서 근무하는 직원들에게 비상이 걸렸다. 캐디와 프로골퍼 등 골프장 직원들이 필자가 개발한 유행성출혈열 예방백신을 맞기 위해 쇄도했다. 마침 임상실험 대상자가 없어 애를 먹고 있었는데 뜻밖의 행운이 찾아온 것이다.
우리는 본인의 동의를 일일이 얻은 뒤 약 5백60여 명에게 예방백신을 접종할 수 있었다. 1개월 간격으로 2회 접종하니 항체 생성률이 98%에 달했다. 서울 시내에 있는 4개 대학병원에서도 각각 지원자를 대상으로 임상시험을 했다. 연구 결과들은 1989년 서울에서 개최된 제6차 국제유행성출혈열학회에서 발표되고 인정을 받았다. 1990년 7월 마침내 정부의 제조 허가와 시판 허가를 녹십자사가 받았고, 9월엔 한타박스란 이름으로 첫 제품이 나왔다.
많은 사람들이 국산 신약 1호를 1998년 모 제약회사에서 만든 항암제로 알고 있다. 그러나 진짜 국산 신약 1호는 필자가 1990년에 제조 허가를 받은 한타박스라고 해야 옳다. 치료제가 아닌 예방백신이지만 세계 최초로 발견한 바이러스와 국내 기술에 의해 세계 최초로 개발된 신약은 대한민국 보건복지부로부터 품목 제조허가를 받은 첫 제품이 한타박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국산 신약 1호 탄생은 순조롭지만은 않았다. 한창 백신개발에 열을 올리고 있던 1989년 5월 녹십자사의 최정순 연구개발 이사로부터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들었다. 일본 오사카대학 미생물병연구소가 우리나라 특허청에 유행성출혈열 예방백신 특허를 출원했다는 것이 아닌가.
오사카대학은 내가 있던 고려대 바이러스연구소와 자매결연을 맺고 있던 곳이어서 한탄바이러스 샘플을 제공하는 등 호의를 베풀었던 곳이다. 심한 배신감에 사로잡혔다. 그러나 아무리 기술이 앞서 있어도 특허를 빼앗기면 무용지물이 아닌가.
나는 그때 서울에서 개최된 WHO회의에 참석한 오사카대학 미생물병연구소 야마니시(山西)교수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엄중이 항의했다. 그는 절대로 그럴 리 없다고 강력히 부인하면서 그렇다면 자기는 오사카대학을 그만두겠다고 하며 사실을 확인해 보겠다고 했다. 그날 저녁 전화로 알아 봤더니 오사카의대 교수가 신청한 것이 아니라 그곳과 관련을 맺고 있던 일본 시코쿠(四国) 소재 일본뇌염백신 공장에 있는 후쿠이(福井) 교수가 저지른 소행으로 밝혀졌다.
뒤통수를 얻어맞은 나는 반격할 준비를 했다. 다행히 그들이 제출한 신청서에서 몇 가지 문제점이 드러났다. 백신 제조 특허를 신청하기 위해선 먼저 바이러스의 특성부터 제출해야 한다. 그런데 그들은 쥐의 육종(肉腫)에서 분리한 서울바이러스를 특허청에 냈다. 하지만 백신 개발에 쓰이는 바이러스는 동물의 종양이 아닌 환자의 혈액에서 뽑아 낸 한탄바이러스라야 한다. 게다가 육종이라면 암세포가 아닌가. 육종에서 뽑아 낸 바이러스로 백신을 만들었다가 사람에게 암과 같은 부작용이 생긴다면 누가 책임을 질 것인가.
한탄바이러스가 아닌 서울바이러스였던 것도 문제였다. 서울바이러스는 병원성이 약해 이를 재료로 예방백신을 만들면 한탄바이러스에 대한 충분한 면역력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그들의 특허 출원은 1992년 특허청으로부터 기각 판정을 받았다. 야마니시 교수는 내게 “공장 사람들이 돈에 눈이 어두워 그랬다”며 정식으로 사과했다. 하마터면 공들여 쌓은 탑을 고스란히 남에게 빼앗길 뻔했던 것이다.
한타박스와 관련된 두 번째 시련은 야외 임상실험이었다. 백신의 효능이 입증되려면 접종 후 단순히 혈액에서 항체가 생성됐다는 것보다 실제 질병이 생기지 않았다는 것을 유행지역 현장에서 확인해야 하기 때문이다. 정부에서도 한타박스에 대해선 야외 임상실험을 한다는 전제조건 하에 시판을 허가했다. 처음엔 군인을 대상으로 야외 임상실험을 시도했다. 이미 미국육군연구개발사령부로부터 1989년 1백30만 달러의 야외 임상실험 연구비까지 확보한 상태였다.
백신은 녹십자사에서 무료로 공금하기로 했다. 유행성 출혈열 최대 유행지역이 한국군이 위치한 전방지대였으므로 이들 2만여 명에게 야외 임상실험을 실시하기로 했다. 그러나 국방부 의무사령부가 반대했다. 국군이 미군을 위해 모르모트가 될 수는 없다는 단순한 이유에서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