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방부 육군의무사령부의 반대는 일견 타당하게 보였다. 그러나 행여 옹졸한 국수주의가 개입하지 않았나 하는 아쉬움도 남는다. 당시 유행성출혈열은 한국에 주둔한 미군에서는 매년 3~4명밖에 발생하지 않는 반면 국군에선 1~2백 명 이상의 환자가 입원했다.
우리 측 피해가 훨씬 크며 미군보다 한국군이 절실히 필요한 것이었다. 백신의 효능을 검증하기 위한 야외 임상실험은 실제로 가장 많은 환자가 발생하는 지역에서 실시해야 효과를 알 수 있으며 학문적 가치가 있다.
무엇보다 임상실험에 대한 우리 국군의 부정적 태도가 문제였다. 아직도 언론에서 ‘임상실험’을 ‘인체실험’으로 오시하는 경우가 잦다.
그러나 임상실험은 비인도적인 인체실험과 달리 신약 개발을 위해 거쳐야 할 필수불가결한 절차이며 사전 동의는 물론 부작용 최소화를 위해 엄격한 과정을 밟는다. 게다가 무료로 실시되므로 미국에선 많은 난치병 환자들이 임상실험을 받기 위해 몰려들 정도라고 한다.
한국인에게 특히 군인에게 흔한 유행성출혈열에 대해 한국인 학자가 예방백신을 세계최초로 개발했는데도 한국에선 임상실험을 못하는 불상사가 생긴 셈이다.
결국 나는 한타박스의 야외 임상실험을 1995년 유고에서 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한국의 경우처럼 임상실험이란 최소한의 부담은 지지 않고 신약개발의 혜택만 얻으려 하는 것은 지금 생각해 봐도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걸맞는 행동은 아닌 듯싶다.
유고는 당시 보스니아 내전중이어서 전쟁터에서 숱하게 많은 유행성출혈열 환자가 발생했다. 이른바 인종 청소 때문에 미국 등 서방으로부터 경제 제재까지 받고 있던 터라 당시 유고는 외국의 모든 지원이 절실했다. 유고에는 내가 잘 아는 그리지크 박사가 있었는데, 그는 나에게 도움을 요청해 왔다.
필자는 주용규 박사와 함께 4천 명 분의 백신을 가지고 유고를 직접 방문해 야외 임상실험을 공동으로 하기로 했다. 그들은 대환영이었다. 어려운 때에 무료로 대량의 예방백신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안기부 등 우리 정부로부터도 인도적 차원에서 예방백신을 제공하는 것이니 외교상 문제가 될 것이 없다는 허락도 받았다. 한국으로부터 백신 지원을 받았으니 유고를 후진국으로 생각하는 독자들도 있겠으나 이는 사실과 다르다. 유고는 일찍이 과학 분야에서 8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한 국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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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백신 야외 임상실험을 하기 위해 1995년 11월에 유고슬라비아를 방문했다 / 왼쪽 두번째가 필자이고, 중앙의 모자를 쓴 이가 그리지크 박사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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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1996년 9월 유고 연방 몬테네그로공화국에서 처음 야외 임상실험을 실시했다. 2천 명에겐 한타박스를 접종하고 다른 2천 명에겐 모양은 한타박스와 똑같지만 생리적 식염수만 담은 위약(僞藥)을 접종했다. 결과는 1년 후 위약을 준 그룹에선 20명이나 환자가 발생했지만 한타박스 접종자에게선 한 명의 환자도 발생하지 않았다. 대성공인 셈이었다.
그러나 시련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모든 것이 순조롭게 진행되던 1990년대 중반 어느 날 녹십자사의 허영섭 사장으로부터 엉뚱한 소릴 들었다. 고등학교 동기생인 Y대 Y교수가 자신을 찾아와 필자가 개발한 한타박스는 한탄바이러스가 가짜이기 때문에 엉터리 백신이니 당장 생산을 중단해야 한다고 했다는 것이다.
한타박스의 효능에 대한 시비가 일기 시작한 것이다. 심지어 Y대 L교수는 미생물학 강의시간에 “한타박스가 엉터리 백신임은 물론 이박사가 발견했다는 한탄바이러스도 실제 존재하지 않는 엉터리 바이러스”라고 강의했다지 않은가. 때마침 뇌염 예방백신 사고가 잇따라 언론에 보도되고 있었고 보건의료계에도 개혁 바람이 불던 시기였다. 예방접종 심의위원회가 구성되어 필자의 한타박스를 비롯해 당시 국내에서 생산중인 모든 백신의 효능과 부작용에 대해 전면적인 재조사가 시작됐다.
한타박스를 둘러싼 비방이 모 소아과의사를 중심으로 잇따라 터져 나왔다. 어떤 엉터리 교수는 백신 접종자나 비접종자의 항체 생성률이 똑같다는 발표를 했다. 백신을 맞지 않은 사람에게서도 항체가 26%나 나왔다는 것이다 .상식 밖의 결과다. 1%도 차이가 나지 않았다니 생리적 식염수를 주사 맞은 사람에게 항체가 생겼음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백신 검정을 한 국립보건원은 사기를 쳤단 말인가.
또 실험을 해본 일도 없는 어떤 교수는 미국에 혈청을 보내 조사했더니 중화항체 생성률이 국립보건원과 WHO연구협력센터가 학계에 보고한 것의 3분의 1에 불과했다고 발표하기도 했다. 정말 기가 차고 어이가 없는 일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