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대학에서 몰러났지만 앞으로도 건강이 허락하는 한 여생을 연구와 학술활동에 바칠 생각이다. 현재 유행성출혈열 등 여러 종류의 바이러스 질환을 한꺼번에 예방할 수 있는 혼합 백신을 개발해 러시아 등 동유럽권으로 수출하는 일을 추진하고 있으며 열대지방에 흔한 뎅기열을 간편하게 진단해 내는 키트를 개발하였다. 후학의 양성에도 힘을 쏟을 각오를 하고 있다. 필자가 4억5천만 원의 상금과 백신의 로열티를 모아 설립한 한탄생명과학재단이 그 모체다.
재단에서는 한탄상을 제정해 매년 바이러스와 미생물학 연구분야에 공이 많은 후학에게 대한바이러스학회 학술대회장에서 1천만 원의 상금과 함께 금메달을 수여하고 있다. 반세기 동안 바이러스 연구에 매달린 필자에게 학자로서 성공의 지름길을 묻는다면 다음과 같은 충고를 들려 주고 싶다.
첫째, 뚱딴지처럼 들릴 지도 모르지만 우선 가정에 충실해야 한다.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이랄까, 한평생 연구에 몰두해야 하는 학자에게 가정의 건강과 평안은 성공을 위한 필수조건이다. 특히 아내의 역할이 중요하다. 나의 집사람 김은숙은 그 동안 수백 명의 외국 학자를 집으로 초대해 숙식을 제공하며 필자가 추진한 국제간 공동 연구의 물꼬를 트는 데 많은 도움을 줬다. 학자로서 대성하고 싶다면 먼저 과학자를 이해하고 자랑스러워하는 아내부터 구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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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내와 함께 1990년 한국과학상 수상식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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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좋은 스승을 모셔야 한다. 사회 모든 분야에서도 그러하듯 적수공권(赤手空拳)의 젊은이가 성공하기 위해선 이른바 유력한 후원자의 눈에 띄어야 한다. 학계에서 성궁을 위해 필요한 후원자란 다름 아닌 스승이다. 가능하면 당대 최고의 석학 아래에서 박사과정을 끝내고 연구 생활을 시작하는 것이 좋다. 그래서 그와 공동으로 적어도 2편 이상의 논문을 「네이처」나 「사이언스」 등 저명한 잡지에 게재한다는 목표를 세워야 한다. 나도 미네소타대학 유학시절 가혹하리만큼 엄격한 지도교수 아래서 연구를 시작한 것이 두고두고 힘이 되고 있다.
셋째, 학자는 올라운드 플레이어가 되어야 한다. 고상하게 책상에서 펜대만 굴리려고 해선 안 된다. 나 역시 유학시절 좋은 연구 결과를 얻기 위해 매주 도살장을 직접 찾아 돼지의 태반을 고른 경험이 있다. 이는 특히 박사학위를 따기 위해 외국 유명대학에 들어가는 학생이 명심해야 할 사항이다. 간판만 믿고 ‘내가 누구인데 대접이 시원치 않다’며 투덜거려선 안 된다.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판다는 격언 그대로다.
앉아서 연구에 필요한 지원을 기다릴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직접 찾아 나서야 한다. 필자가 공부했던 1950년대와 달리 요즘은 역량이 있는 학자라면 연구비가 넘쳐나 오히려 고민인 시대다. 연구비를 따오기 위해선 실험실에 파묻혀 시키는 연구만 할 것이 아니라 연구 계획서를 잘 쓰고 유력한 사람을 만나는 등 외교적인 노력도 필요하다. 거래를 할 땐 사업가다운 기질도 필요하다. 필자도 일본의 실험용 쥐 혈청검사와 관련된 일본실험동물협회와의 거래에서 배포 있게 부른 계약 조건이 주효해 연구에 많은 도움을 받기도 했다.
선진국치고 그 나라를 대표하는 간판 학자가 없는 곳은 없다. 영국은 뉴턴, 프랑스는 파스퇴르, 미국은 아인슈타인 하는 식이다. 심지어 이들은 자국민이 사용하는 지폐의 인물로도 등장한다. 양자역학으로 유명한 오스트리아의 물리학자 슈뢰딩거가 그 대표적 사례다.
아직까지 한국을 대표하는 과학자로 세계인의 이목을 끈 인물이 없다는 것은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한국인은 자질 면에서 어느 민족보다도 우수하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비록 필자의 당대엔 실현되지 못했다 하더라도 후대에선 반드시 세계 속에서 한국을 빛낼 과학자들이 탄생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