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식사 후면 우리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기숙사 로비에 삼삼오오 모여들었다. 서로 연구 분야는 달랐지만 낮선 미국 땅에서의 적적함을 달래기 위해서였다. 그러다보니 영어는 점점 더 낯설기만 했고 도리어 한국말이 더 늘었다. 시간만 되면 한국 사람끼리 모였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강의시간에는 칠판글씨만 이해가 되었을 뿐 교수들이 말하는 강의 내용은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러다간 큰일 나겠다 싶었다. 나처럼 조교로 가서 미국인과 똑같이 석사과정 2년을 마쳐야 하는 경우엔 모든 과목에서 B학점 이상(80점 이상)을 받아야 했다. 게다가 이곳의 시험출제 방식은 단순한 사지선다형이 아니라 4개 항목 중 정답이 복수인 이른바 ‘멀티플 초이스’였다. 그러니까 4개 항목을 모두 꿰뚫지 못하고 한두 개 항목만 알아선 차라리 아무 것도 모르니만 못했다.
그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미국 학생의 노트를 베끼는 것이었다. 주로 금요일 저녁에 빌려 토요일과 일요일 기숙사에서 꼼짝 않고 노트를 베꼈다. 재미있는 것은 그래도 나는 실전에 강해서 한번은 중간시험 때 나에게 노트를 빌려준 백인 학생보다 높은 점수를 받아 겸연쩍은 적도 있었다.
강의뿐만 아니라 실험실에서도 어려움이 많았다. 서울에선 기껏 염색 한두 번 해보는 것에 그쳤는데 이곳에서는 균을 직접 배양하고 동정하는 등 난생 처음 해보는 실험을 직접 해야 했다.
당시 미네소타의대 미생물학교실의 주임교수는 소아마비 바이러스 연구의 세계적 권위자인 시버튼(syverton) 박사였다. 그가 1년에 따오는 연구비만 당시 돈으로 1백만 달러 이상에 달했다. 지금이야 소아마비는 멸종되다시피 한 바이러스지만 당시엔 위세가 대단했다. 미국에서 매년 5~6천 명의 환자가 발생해 3천여 명이 장애인이 되거나 사망했다. 살아남는다 해도 지능저하거나 다리를 저는 장애인이 되었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도 소아마비 희생자가 아니었던가.
시버튼 교수는 1956년 어느 날 나를 자신의 사무실로 불렀다. 나에게 석사학위 논문의 주제를 주기 위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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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7년 12월 미네소타대학교 대학원에서 미생물학 석사학위를 받은 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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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나에게 일본 뇌염바이러스를 연구해보라고 지시했다. 미국과 달리 한국엔 뇌명이 풍토병처럼 유행하고 있으니 한국사람인 내가 일본뇌염을 연구하면 국가 발전에 기여하는 일이며, 그것은 당연하다는 논리였다. 문제는 그가 내놓은 연구 주제가 그동안 나에게 익숙한 세균이 아니라 생소한 바이러스였다는 점이었다. 당시까지 한국인으로서 바이러스학을 전공하고 연구 결과를 보고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바이러스는 세균과 달리 보통 현미경으로 보이지도 않고 일반 세균배지에서 자라지도 않는다. 소아바이러스 감염 여부를 알기 위해선 사람과 비슷한 원숭이를 이용했다. 가령 소아마비가 의심되는 사람의 혈액을 빼내 이것을 원숭이 뇌에 주사해 원숭이가 병에 걸려 마비 증상을 일으키거나 사망하는 것을 보아야만 소아마비로 진단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소아마미 환자 한 사람을 혈청 진단하려면 적어도 5마리 이상의 원숭이가 필요했다. 실험 비용도 비용이지만 원숭이를 사육하면서 원하는 증상이 나타날 때까지 수주 이상 기다려야 하는 것도 문제였다.
이러한 바이러스 연구의 어려운 한계를 근본적으로 깨뜨린 것이 미국 하버드의대의 엔더스(Enders)교수였다.
그는 1951년 세계 최초로 소아마비 바이러스를 유리 시험관에서 배양한 원숭이의 콩팥상피세포에서 배양해 보통 현미경으로 세포가 파괴되는 이른바 ‘세포손상효과(cytopathic effect)'를 관찰하는데 성공했다. 정상 콩팥세포와 바이러스에 감염된 콩팥세포의 현미경 사진을 봍여 놓은 A4용지 두 장짜리 논문 하나로 그와 그의 동료는 1954년 노벨물리의학상을 수상하게 된다.
그의 연구 공로로 굳이 원숭이를 여러 마리 죽이지 않고도 콩팥조직 일부만 떼어내 시험관에서 배양한 다음 여기에 의심되는 환자 혈액 등 시료를 가해 3~5일 배양 후 현미경으로 세포손상효과만 관찰함으로써 바이러스 감염여부를 쉽게 알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지도교수로부터 영하 60도의 냉장고에 보관해 온 일본뇌염바이러스를 받아 흰쥐의 뇌에 접종하여 여러 번 배양한 후 실험재료를 다량 확보하였다. 그리고 미국에 와서 배운 새로운 기술인 조직배양세포에서 일본뇌염바이러스를 배양하는 연구에 뛰어든 것이다. 내가 바이러스 학자가 된 것은 지도교수 덕분이었고, 타의에 의한 것이었다. 아니, 운명이라는 표현이 더 낫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