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험에 사용한 애저 (제7회)

박사과정 시절 나의 중요한 일 중 하나는 미니애폴리스에서 자동차로 약 40분 거리에 있는 호멜(Hormel)이라는 식품회사의 도살장을 매주 찾는 것이었다.

일본뇌염바이러스를 배양하기 위해선 배지의 콩팥조직이 반드시 필요했는데, 이 회사에는 특수한 종류의 작은 돼지가 있었다. 매일 2천 마리가 넘는 돼지를 도살하던 도축장의 모습은 아직도 눈에 선하다. 돼지 떼를 일렬로 몰아넣은 뒤 다리에 족쇄를 채워 거꾸로 매단 뒤 가스실에 넣고 마취를 시킨다. 그리고 경동맥을 끊어 죽이고, 피를 뺀 돼지가 컨베이어에 실려 나오면 시퍼런 칼을 양손에 든 도축자 50여명이 줄지어 서서 돼지의 배를 가른 뒤 내장은 버리고 필요한 부분은 골라낸다.

결코 보기 좋은 장소가 아니었음에도 내가 매주 한번 이곳을 들은 이유는 오염되지 않은 신선한 돼지새끼, 그것도 태어나기 일보 직전의 태반에 싸인 애저(돼지 태아)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일본뇌염바이러스는 이처럼 매우 까다로운 조건을 갖춘 돼지새끼의 콩팥상피세포에서만 배양할 수 있었다. 실험재료가 나쁘면 아무리 정밀하게 실험실에서 연구를 수행해도 잘못된 결과가 나올 수밖에 없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과학자라면 깨끗한 연구실에서 깨끗한 흰옷을 입고 복잡한 실험기구와 팬대나 굴리는 고상한 직업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진정한 과학자는 연구에 필요한 것이면 알파에서 오메가까지 모두 직접 챙길 줄 알아야 한다.

특히 내가 몸담은 미생물학은 대부분 현장에서 연구가 이뤄진다. 괴질이 유행하면 때론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직접 현장을 찾아가 의심되는 괴질 환자의 혈액이나 조직 등 필요한 재료를 직접 채취해야 성공한 확률이 높다. 그런 점에서 내가 직접 월요일 아침마다 도살장에 가서 살아있는 애저를 가지고 와 실험한 경험은 좋은 교훈이 되었다.

나는 그 후 중요한 연구는 모두 내가 직접 챙기는 습관이 생겼다. 실험과 더불어 당시 나를 괴롭혔던 것은 엄격한 미국의 시험제도였다. 대학교수들은 외국에서 온 유학생이라고 적당히 봐주고 학위를 주는 것이 아니었다.

▲ 실험용 애저를 구하기 위해 도살장에 타고 다니던 차에서 (1957년)

말도 안 통하는 데다 향수병까지 겹쳐 첫 1년은 정말 살 맛 나지 않았다. 게다가 주말이면 가난한 나라에서 온 사람에게 자비를 베풀려고 했는지는 몰라도 여러 단체와 가정으로부터의 초빙이 많았다.

처음에는 거절할 수가 없어 따라갔지만 돌아와선 후회하곤 했다. 가는 곳마다 너희 나라엔 자동차가 있느냐, 무얼 먹고 사느냐는 질문을 해댔으며, 무엇보다 그들의 음식이 입에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특히 그네들은 주로 쌀과 야채만 먹고 산다는 우리 식생활이 못내 이해되지 않는다며 의아해했다. 어떻게 고기를 먹지 않고 힘을 낼 수 있느냐는 것이다.

자존심이 이만저만 상하는 것이 아니었다. 전쟁을 두 번이나 겪고 배고프게 산 것도 가슴 아픈데 남이 잘 사는 것을 보니 나는 왜 하필 한국처럼 가난한 나라에서 태어나서 고생을 해야 하는지 자학적인 질문까지 스스로 하곤 했다. 그러나 모든 것을 참고 지나고 나니 그러한 열등감이 내겐 성취욕으로 작용했다는 생각도 든다.

1986년 나는 매년 20만 명의 유행성출혈열 환자가 발생하는 중국을 돕기 위해 WHO자문관으로 중국에 갔다가 옌벤(延邊)에 살고 있는 조선족 젊은이를 만난 적이 있었다. 놀라운 것은 그들로부터도 조상을 잘못 만나 중국에서 이 고생을 하며 산다는 푸념을 들었다. 그때만 해도 중국인은 너무나 가난하고 자유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그들에게 내 경험을 들려주며 당신의 열등감이 오히려 세상을 훌륭하게 바꾸는데 기여할 수 있다며 격려해주었다.

미국에 간지 1년이 지나고 3학기 째 접어든 1956년 가을 나는 마침내 ‘사고’를 치고 말았다. 오기에 받쳐 밤새워 공부한 끝에 70여 명이 듣던 의학미생물학 과목에서 98점으로 최고 점수를 딴 것이다.

담당 교수였던 왓슨 교수는 강의 도중 침이 마르게 나를 칭찬해 무안할 지경이었다. 그러나 내가 그처럼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은 역설적으로 내 영어가 짧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당시 문제가 여러 종류의 세균 분리에 대해 서술하라는 주관식 문제였다. 다른 미국 학생들은 문장으로 빽빽하게 기술했던 반면, 나는 영어 포현에 자신이 없어 간결하게 도표를 그리고 설명을 추가했는데 그것이 오히려 주효했던 것이다.

인생은 때로 하찮은 계기로 반전하곤 한다. 한 과목에서의 1등이 내게 자신감을 불어넣어 준 것은 물론 뜻하지 않은 행운까지 안겨주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