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년 10월 26일 저녁, 나는 MBC TV방송을 보고 깜짝 놀랐을 뿐 아니라 비통한 생각마저 들었다. 정말 우리나라 언론이 어느 나라 언론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한심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같은 연구 결과임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 먼저 이룩한 연구업적은 무시하고 외국에서 후에 보도한 것은 톱으로 다루다니 자존심이 상하는 것이었다.
보도 내용인즉 1년 전에 한국에서 발표한 유행성출혈열백신과 같은 백신을 일본에서 처음 개발하였다는 것이다. 이 같은 사실은 1987년 8월 10일에서 20일에 걸쳐 서울 롯데호텔에서 개최된 태평양과학자회의에서 우리가 먼저 발표했었다. 한국 학자가 발표했을 때에는 우리 언론들이 무시하고 넘어가 버리고 약 1년 후에 똑같은 내용을 일본 신문이 보도하니 우리 언론도 덩달아 해외 톱뉴스로 취급한 것이다.
1987년 8월 중순 서울에서는 국제태평양과학자회의가 있었고 유행성출혈열에 관한 심포지엄이 18~19일 이틀간 있었는데 여기서 50여 개의 연제가 발표되었으며 그때 우리는 유행성출혈열 예방백신을 세계최초로 개발했다는 발표를 하였다.
또 이에 앞서 WHO는 8월 10일부터 13일까지 4일간에 걸쳐 유행성출혈열 백신 워크숍을 서울의 조선호텔에서 개최하였는데 여기에서도 한국, 일본 및 중공학자들이 연구하고 있는 백신에 대한 각종 데이터가 제시되고 토론되었다. 회의 결과를 종합하면 한국에서 개발한 유행성출혈열에 대한 백신이 가장 면역 효과가 좋으며 의학적 측면에서도 우수하다는 결론이 나왔던 것이다.
학문에 있어서 특히 기초과학의 연구 업적은 국제적으로 인정된 국제학회에서 발표되고 논의된 후 인정받은 다음 국내외에서 보도되는 것이 상례인데 이번의 경우는 그와 반대였다. 서울에서 개최된 국제학회에서 한국인에 의해 처음 발표되었는데도 불구하고 한국 매스컴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보도하지 않았으나 문제는 이와 반대로 일본 사람들이 모여서 하는 일본학회에서 발표된 연구 결과는 해외 톱뉴스로 보도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같은 사대주의적 발상은 이 일뿐만 아니라 다른 분야에서도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한국인의 머릿속에는 무의식적으로 우리 것은 믿지 않고 남의 것은 잘 믿는, 또는 한국인의 결과는 깎아 버리고 남의 것은 우러러보는 습성이 있다.
이는 오랜 식민지생활에서 온 열등감의 잔재가 아닌가 싶다. 더 솔직히 말해서 사촌이나 옆집 사람이 논밭을 사면 배가 아프지만 외국 사람이 잘살면 무조건 떠받드는 심리는 우리가 잘살지 못하고 심한 생존경쟁에 시달려 온 의식구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런 일들은 하루 속히 시정되어야 한다. 우리들은 서로 아끼고 도와 줄 수 있는 슬기로운 의식을 가져야 하며 우리 후세들에게 아름다운 전통을 남겨 줘야 할 책임이 있다. 그래야만 우리의 후학들이, 아니 우리 후손들이 자존심과 긍지를 갖고 세계로 뻗어 나갈 수 있으며 국가 발전에도 크게 이바지하게 될 것이다.
우리 언론은 우리 과학자들을 밀어 주고 키워 주어야 한다. 그래야만 우리나라에서 노벨과학상 수상자가 하루라도 빨리 배출될 수 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