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콜롬비아 대통령이 내한했을 때 갑자기 복통을 일으켜 서울대병원에 긴급 입원한 적이 있었다.
병명은 장벽이 주머니처럼 늘어나고 염증이 생긴 대장(大腸)게실염(憩室炎)이었다. 늘어난 부분을 잘라 내고 다시 꿰매 주는 수술로 아무 탈 없이 간단히 치료할 수 있는 질환이었다.
그러나 평범한 환자였다면 1주일 만에 퇴원했을 대장게실염이었지만 벽안의 노 대통령은 VIP인지라 이국땅에서 한 달 이상 장기 입원하는 수모를 겪었다. 이유는 국가 원수에 대한 예우차원의 대접 때문이었다. 수술 환자의 마취는 대부분 마취과 전공의들이 담당하는데 이날만은 수술장의 마취 현장에서 손을 뗀 지 수십 년 된 노 주임교수가 직접 마취를 맡았다. 문제는 마취과 의사가 마취 외에 수액 공급도 전담한다는 사실이다. 수술 도중 링거주사를 통해 수액 조절을 해줘야 하는데 손이 익숙하지 못해 수액 과다공급이란 예기치 않은 후유증이 생긴 것이다.
VIP증후군과 관련되니 또 다른 경우를 들어보자. 자신이 이름만 대면 알 만한 명의에게 수술을 받았는데 수술부위의 절개길이가 짧다고 자랑삼아 말하는 이들도 있다. 다른 사람이면 30㎝를 절개하는데 이 명의는 자신에게 20㎝만 절개하는 서비스를 베풀었다는 식이다.
하루 입원비가 30~40만 원을 넘는 유명 종합병원 특실에 입원한 부유층 환자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사례다. 자신이 특별대접을 받았다며 대부분 만족해한다. 하지만 이 역시 자세한 내막을 알고 보면 난센스가 아닐 수 없다.
절개 길이는 단지 눈으로 보이는 미용상 문제일 뿐 수술 결과와는 무관하다. 오히려 절개를 충분히 해야 내부 장기를 잘 볼 수 있으므로 훨씬 좋은 결과가 나올 수 있다. 짧은 절개 길이는 명의들이 어떤 경우든 특별대접을 받는 것에 익숙한 유명인사들에게 인사치레 정도로 제공하는 실속 없는 서비스에 불과하다. 이들 모두 유명인사에게 흔히 나타나는 VIP증후군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당시 필자의 복통도 영락없이 VIP증후군으로 생각된다. 그때 민병철 교수는 내게 수술을 권유했다. 일단 열어 보고 원인을 찾은 다음 대처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내과의사와 일부 외과의사들이 반대했다. 가능하면 몸에 부담이 되는 수술을 하지 말고 약으로 치료해 보자는 식이었다.
아마 보통 환자였다면 바로 칼을 대었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나는 내과의사들의 말을 듣기로 했다. 나 역시 몸에 칼을 대는 것이 싫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민교수의 말을 듣지 않은 것이 몹시 후회가 된다. 왜냐하면 나는 1983년 첫 복통발생 이후 무려 10년간 20차례에 걸쳐 복통 발작에 시달렸기 때문이다.
다행히 첫 복통은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좋아졌으며 1주일 후 퇴원했다. 처음엔 수술하지 않은 것을 잘 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6개월 후 두 번째 복통이 찾아왔다. 그때도 일본에 출장 갔을 때였다. 하마마츠(浜松) 시에서 강연을 했을 때인데 그곳 명산물인 장어구이 정식을 2인분이나 먹고 난 뒤 갑자기 복통이 찾아온 것이다. 필자의 복통은 단순한 복통이 아니었으며 통증을 가라앉히는 데 흔히 사용하는 부스코판이 듣지 않아 마약진통제인 데메롤을 맞아야만 했다. 한 대만 맞으면 하루 만에 나았다.
|
|
| ▲ 1989년 중국 옌볜대 교수로 추대 됨 / 지린(吉林)성 옌지 시 교외에 있는 선구자 가사에 나오는 해란강을 바라보고 있는 필자 부부 |
|
이 때부터 나를 둘러싸고 흉흉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또 외국으로 떠날 때마다 의사에게 처방받은 데메롤을 갖고 가 주사를 맞으니 내가 암에 걸렸다거나 아니면 마약에 중독됐다는 헛소문이 퍼진 것이다.
이렇게 질질 끌던 복통은 내가 정년퇴임을 2년 앞둔 1992년 가장 심하게 나타났다. 이번엔 뿌리를 뽑기 위해 MRI(자기공명영상촬영검사) 등 병원에서 할 수 있는 검사란 검사는 죄다 받았지만 특별한 이상은 발견할 수 없었다. 남은 것은 대장내시경 검사뿐이었다.
나는 끝으로 대장내시경 검사를 받기로 마음먹었다. 대장내시경이란 항문을 통해 대장 속으로 내시경을 삽입해 의사의 눈으로 직접 장 속을 살펴보는 검사다. 번거롭고 지저분하기도 하거니와 통증도 있어 쉽게 받긴 어렵다. 대개 항문에서 가까운 직장(直腸)만 살펴보는데, 나는 내시경 끝이 2m 이상 들어가 대장 전부와 소장의 일부를 이 잡듯 뒤지는 검사를 받았다.
당시 나의 대장내시경검사는 지금 고려대병원 의료원장으로 있는 현진해 박사가 맡았다. 현박사는 국내에서 가장 내시경을 많이 시술한 유명한 내시경 전문가다. 한참 내시경을 들여다보던 현박사는 “선생님, 드디어 원인을 찾았습니다. 이게 말썽을 부렸군요”라며 소리쳤다. 나도 내시경 기계와 연결된 TV에 달린 화면을 통해 문제의 장면을 보았다. 맹장(盲腸) 입구에 빨간 콩알크기 만한 염증 부위가 보였다.
맹장은 의학용어로 충수돌기다. 이곳이 발갛게 부어 있었으며, 콩알 같은 염증 부위가 5개나 보이는 것이 아닌가. 영락없는 맹장염이었다. 10년 동안 나를 괴롭혀 왔던 질환이 고작 만성재발성 맹장염이라니 어이가 없었다.
바로 다음날 수술에 들어갔다. 수술은 일반외과의 베테랑 황정웅 교수가 맡았다. 불과 10분 만에 수술은 끝났다. 황교수는 내게 “수십 년째 외과 교수를 해 왔지만 이렇게 작게 쪼그라든 맹장은 처음 본다”는 말과 함께 잘라 낸 맹장을 보여 줬다. 동전 하나 크기도 안 되어 보였다. 쓸데없이 고집을 부렸던 탓에 필자의 맹장은 10년간 혼자서 끙끙 앓아 온 것이다. 처음 아팠을 때 민병철 교수의 말대로 바로 수술에 들어갔더라면 깨끗하게 해결될 것을 10년이나 간직하고 헛고생을 한 셈이다.
지금까지 1년에 한두 번 나를 괴롭혀 온 복통은 맹장염 수술 후 씻은 듯이 사라졌다. 필자가 개업 중인 동료들과 만나 이런 이야길 꺼내면 그것이 바로 VIP증후군이라고 꼬집는다. 평범한 환자였으면 쉽게 해결될 것을 VIP라고 의사들이 이것저것 견주다 보면 이런 불상사를 낳는다는 것이다.
내가 그 정도였으니 정계나 재계의 거물 등 진짜 VIP가 아플 땐 오죽하랴 싶었다. 게다가 맹장염은 사람에 따라 천태만상이어서 가장 진단이 어려운 질환이라지 않은가. 오진율도 제일 높다고 한다.
실제 의료 소송이 많은 미국에선 외과의사가 맹장이라고 진단해 수술장에 들어가 배를 열었는데 맹장염이 아닌 경우 잘라낸 맹장조직을 바닥에 문질러 일부러 염증을 일으킨다고 하지 않는가. 열이 나고 오른쪽 하복부가 아픈 복통이라야 맹장염인 것은 아니다. 나처럼 열이 없고 위가 아프고 배가 구석구석 아픈 복통도 맹장염일 수 있으니 비슷한 증상을 갖고 있는 독자라면 참고가 될 수 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