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전처분(保全處分)으로 입는 피해
갑은 그 소유 대지에 대하여 을과 매매계약을 체결했다. 땅을 팔아서 그 자금으로 계획한 사업을 시행하기 위해서였다. 매매대금은 10억 5천만 원, 계약금은 1억 원, 잔금은 90일 내에 받기로 했다. 매매계약서에는 통상의 예대로 을이 잔금을 지급하지 않을 때에는 계약금은 갑에게 귀속하고 갑이 위약한 때에는 계약금의 배액(倍額)과 이로 인한 사업손실금을 을에게 지급한다고 했다.
잔금 지급기일이 지나도 을로부터 아무 연락이 없어 전화를 했더니 며칠만 기다려주면 해결하겠다고 하여 그 말만 믿었으나 일주일이 지나도 소식이 없어 갑은 해약을 통보하면서 아울러 약정에 따라 계약금은 갑에게 귀속한다고 선언했다. 위의 계약금은 해제권유보(解除權留保)와 해제에 따른 손해배상금의 예정으로 추정되는 것인데, 민법 제565조 제2항은 위의 경우처럼 계약금수수에 따른 해제의 경우 갑은 별도로 손해배상금을 청구할 수 없고 그 계약금을 배상금으로 하도록 하고 있다.
그 후 어느 날 등기를 열람했더니 을이 매매목적물에 가압류(假押留)를 해 두고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너무 놀라 을에게 어찌된 일이냐고 물었더니 곧 해결될 것이다. 미안하다고만 대답하는 것이었다.
갑은 가압류에 대한 이의를 신청할 수밖에 없었다. 갑의 제소명령신청(민사집행법 제287조)에 따라 을은 갑을 상대로 2억 원의 반환을 청구하는 소를 제기했는데, 청구원인 사실인즉 을은 그 부동산과 함께 주변일대의 부동산을 매수하여 고급 빌라를 건립할 계획이었고, 재건축사업의 원활한 진행을 위하여 갑은 매매가격을 누설하여서는 안 된다고 합의했는데, 갑의 위약으로 주변 부동산의 가격이 치솟아 을의 재건축 사업이 곤경에 처했다는 것이었다.
나중에 보니 잔금 지급기일 사흘 전에 법원에 가압류 신청서를 접수시켰고, 갑이 계약해제를 통고했을 때는 이미 가압류등기가 기입되어 있었다. 갑은 어쩔 수 없이 을과의 법정투쟁에 들어간 것이다. 땅을 다른데 처분하는 것도 당분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가압류란 채무자의 재산을 미리 동결시켜 두어 나중에 확정판결을 얻었을 때 그 판결의 집행을 쉽게 하기 위한 보전수단이다. 을이 갑의 채권자라면 을은 갑을 상대로 민사소송절차를 거쳐서 집행권원(執行權原)을 얻고, 다시 강제집행절차를 밟아 권리의 종국적 실현을 할 수밖에 없는데, 민사소송절차는 많은 시일이 소요되고 그 사이에 갑의 재산상태가 악화되면, 을은 애써 승소판결을 받아도 권리의 실질적 만족을 얻지 못하게 된다. 가압류는 을이 입게 될 이러한 손해를 예방할 수 있는 수단으로 쓰이는 것이다. 그런데 을은 갑에 대하여 아무런 채권이 없는데도 법원에 거짓말을 하여 가압류결정을 얻은 것이다.
가압류, 가처분(假處分)과 같은 보전처분은 부동산의 경우 그 권리의 존부(存否)에 대하여 대개 변론을 열지 않고(민사집행법 제280조 제1항, 제301조) 약간의, 담보제공만으로 빠른 시일 안에 결정되며 바로 등기부에 기입된다. 을은 갑으로부터 이미 지급한 계약금을 돌려받을 구실이 없으니까 이러한 제도를 이용하여 일단 갑에 대한 압박수단을 쓰고 본 것이다. 갑이 토지를 다른데 팔기 위해서는 가압류를 풀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 을과의 타협이 불가피할 것이므로 적어도 계약금의 일부는 건질 수 있다는 계산이 깔려 있다.
사실 갑으로서도 딱하게 된 것이 계약금이 문제가 아니라 다른데 빨리 처분하여야 하는데 가압류라는 부스럼이 붙어 있는지라 겉으로는 소송에 응하고 있어도 속으로는 애가 탈 지경이다. 알고 보니 을은 부동산전문업자로서 그 토지를 매입하여 이용하려던 것이 아니고 웃돈을 얹어 다른데 전매하여 그 대금으로 잔금을 치르려는 의도였는데, 그동안에 부동산 값이 오르지 아니하여 계획에 차질이 빚어진 것이었다. 거액의 계약금을 가만히 앉아서 잃는다고 생각하니 억울해서 가압류라는 손쉬운 방법을 써서 갑에게 겁을 주기로 한 것이었다.
보전처분이란 채권의 확보책으로서 채권자에게 절대 필요한 수단임이 틀림없지만, 채무자에게는 알 수 없는 상태에서 비밀리에 심리되어 발령되는 수가 많기 때문에 아무 대책이 없는 무서운 제도이기도 한 것이다.
채무자회사는 어느 날 법원의 서류를 받았다. 검찰, 경찰, 세무서와 같은 기관이름이 찍힌 우편물은 겉봉을 뜯기 전부터 기분이 좋지 않다. 법원도 별로 다르지 않다. 내용을 꺼내어 찬찬히 읽어보니 이런 날벼락이 있나, 채무자회사가 거래하는 다섯 개 은행을 제3채무자로 하여 30억 원 한도로 예금을 가압류한다는 것이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피보전권리(被保全權利)의 존부에 관한 확정적 판단 없이 일단 채무자의 재산을 동결하고, 「제3채무자들은 채무자에게 가압류된 예금채무를 지급하여서는 아니된다」고 명한 것이다. 채권자라는 회사는 껍데기만의 유령회사가 아닌가. 이름만 남아있는 회사가 소명(疎明)대신 법원에 제출한 담보는 공탁보증보험증권이다. 채권자회사는 가압류결정을 얻고 보름 뒤에 폐업했음이 밝혀졌다. 위의 증권은 일반인이나 비상장법인의 경우라도 4백5십만 원 정도면 살 수 있다.
현금공탁인 경우 6억 원을 내야 한다고 할 때, 법원이 지급보증위탁계약을 체결한 문서에 의한 담보제공을 허가했기 때문에(민사집행규칙 제204조, 민사소송규칙 제22조), 그렇게 수수료의 부담이 경미하여 채권자회사와 같은 간판만 있는 당사자까지도 분에 넘치는 권리행사가 가능한 것이었다. 그러니까 그 정도의 현금으로 30억 원이라는 남의 예금을 묶어버린 것이다.
채무자회사의 사장은 그 순간부터 눈앞이 캄캄했다. 위의 청구금액을 공탁하고 그 취소를 신청할 수 있다고 되어 있으니, 현찰 30억 원을 해방금액으로 내야만 가압류를 풀 수 있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채권자가 채무자회사를 상대로 적어도 30억 원의 손해배상청구소송을 할 모양인데, 그에 대해서는 패소할 이유가 없다고 자신이 있지만 당장 예금인출이 막혀 죽을 판이다. 우선 직원들의 월급을 어떻게 조달해야 하나, 돌아오는 당좌수표에 대한 처리는 어떻게 해야 하나, 현실적으로 기업활동이 정지될 위기에 놓인 것이다. 더욱이 채무자회사는 코스닥에 등록되어 있으므로 가압류결정의 사실을 증권업협회에 신고하여야 하고 이는 투자자에게 공시되므로 회사의 대외적 신용과 관련하여 주가가 폭락할 가능성도 있다.
이와 같은 유형무형의 막대한 손해를 나중에 보증보험주식회사로부터 보상받을 길이 있다고 해도 먼 훗날의 일이고 그 보상범위도 문제가 아닌가. 채권자회사는 채권가압류에 의하여 의도한 목적을 성취한 것이었다. 30억 원의 배상을 받겠다는 욕심보다 채무자회사를 우선 골탕 먹여 보자, 그래서 급하면 흥정이라도 들어올 것 아니겠는가 하는 계산이었던 것이다. 2001년의 9. 11 테러로 피해를 입은 미국이 얼굴 없는 적과 싸우는 것하고 다를 것이 없었다.
그러면 채권자라는 회사가 채무자회사를 상대로 이런 권리를 행사하는 내용은 무엇인가. 두 회사는 애초 유사한 품목을 제조‧수출하는 경쟁관계의 업체였는데, 채권자회사의 경영이 악화되고 결국 당좌거래가 정지되는 지경에 이르자, 그 회사의 A라는 무역담당이사가 회사를 사직하고 제3자의 주선으로 채무자회사에 입사하게 된 것이 분쟁의 발단이었다. 채권자 측에서는 채무자회사에 입사하게 된 것이 분쟁의 발단이었다.
채권자 측에서는 채무자회사가 A를 유인하여 채권자회사의 영업비밀을 활용하게 됨으로써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는 것이며, 채무자회사의 사장과 A를 신용훼손죄 등으로 고소하였다. A는 유죄로 확정되었으나 채무자회사의 사장은 A와 공모한 바 없다는 이유로 일찍이 무혐의처분이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채무자회사의 채권자 측에 대한 불법행위의 성립을 인정할 근거는 없는 것이고, 더욱 그 손해액에 대해서도 전혀 이치에 맞지 않는 주장을 내세우고 있었다.
이런 정도의 시나리오로 금방 30억 원의 예금채권을 가압류할 수 있게 되었으니 표면상으로도 형평과 정의에 어울리지 않는 바가 너무 컸다. 가압류에 대한 이의신청을 하고 변론기일이 잡혔으나, 채무자의 제소명령신청에 따라 본안(本案)의 소가 제기되었으므로, 보전사건은 병행심리를 위하여 본안의 재판부로 보내졌다. 그리고는 다급한 채무자 측이 변론기일의 지정을 촉구하는 서면을 제출하는 등 해서 겨우 재판이 개시되었다.
기록을 검토해 본 제1심 재판부도 원고 측의 지연전술의 의도를 대강 눈치 챘는지 변론의 종결을 서두르는 기색이었고, 결국 원고의 청구를 기각하고 가압류결정을 취소하는 판결을 걷게 되었다. 가압류집행이 있은 후로부터 10개월 만이었다. 그동안 채무자회사는 회사를 살려 놓고 보자는 목적에서 사방으로 변통하여 해방공탁(解放供託)을 하고 은행거래를 지속할 수 있었는데, 위의 승소판결에 의하여 30억 원을 도로 찾을 수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