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레 미제라블」을 처음 읽은 것은 중학교 1학년 여름방학 때였다. 담임선생님은 미술 선생님이었는데 책 읽는 것을 크게 권장한 분이었다. 그래서 같은 반 학생들은 너도나도 책 읽기 경쟁을 벌였다. 책상 위에 한 권씩 한 권씩 쌓이는 책을 바라보는 재미란 말로는 형언하기 어렵다.
그러던 가운데 여름방학이 되었다. 나는 좋은 책을 읽고 싶었다. 그런데 어떤 책이 좋은지 알기가 어려웠다. 나는 언뜻 삼촌 방에 있는 책들을 생각했다. 삼촌은 이미 중학교를 졸업했으므로 많은 책을 가지고 있었다. 모두 일본어로 된 것이었는데 나는 소설부터 골랐다.
일제 치하에서 초등학교를 다녔기에 일본어를 일상용어로 썼지만 아직 어리므로 쉬운 소설부터 고르게 되었을 것이다. 그때 손에 잡힌 것이 「레 미제라블」이었다. 세계문학전집에 속한 책이니 틀림없이 좋은 책이려니 생각했다. 큰 책으로 세 권이었는데 너무나 방대했다. 또박또박 읽자니 어렵기도 하고 지루하기도 해서 나는 이야기 중심으로 건너뛰면서 읽었다. 그렇게 했어도 한 여름을 다 보냈다.
나에게 중학교 1학년의 한 해는 여러 의미에서 매우 중요한 시기였다. 유년기에 소년기로 정신적 변화를 꾀하는 때였으므로 삶에 대해서나 세상에 대해 하나하나 눈이 뜨이고 모든 일에 궁금해했다. 게다가 농사일을 하시던 할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셔서 집안에도 큰 변화가 일어났다. 나는 막연하게나마 그런 여러 가지 변화의 의미를 의식했다. 어린 시절은 가고 망망대해 앞에 홀로 선 것 같은 두려움도 있었고 미래에 대한 어떤 꿈 같은 것도 있었다.
그때 「레 미제라블」은 내 삶의 숙명과 같이 나의 진로에 큰 영향을 미쳤다. 비참한 사람들의 인생 이야기. ‘이와 같은 일이 세상에 존재하는 한 내 소설은 영원토록 읽힐 것이다.’ 서문에 적어놓은 이 한마디, 너무나 소신에 찬 이 한마디는 지금도 내 가슴을 친다.
다음 해 겨울방학 때 또 읽고 여름방학 때 또 읽고 해서 세 번을 거듭했다. 중학교 3학년 여름방학 때는 글자 한 자 빼놓지 않고 완독했다. 지금 나는 조각을 하고 그림을 그리지만 내 예술의 밑바닥에는 「레 미제라블」의 영향이 짙게 배어 있다.
그 책에는 서문 다음에 서시(序詩)라는 이름의 짤막한 시 한 편이 실려 있다. 여기 기억나는 대로 옮겨보려 한다.
인생의 문제는 무엇인가
싸우는 것이다
다음의 문제는 무엇인가
이기는 것이다
그다음의 문제는 무엇인가
죽는 것이다
이 한 편의 짤막한 시는 「레 미제라블」 전체를 요약한 것과 같다. 나는 이 시를 지금도 가끔 생각해 보곤 하는데 역시 옳다. 인생이란 싸우는 것이고 이겨야 할 것이고 그런 다음 잘 죽어야 할 것이다. 역사상 큰 인물들은 하나같이 잘 싸운 사람들이며 전쟁을 이겨낸 사람들이다.
사르트르는 조각가 자코메티 전람회의 팸플릿 서문 마지막 부분에 ‘그는 승리하고 있다.’고 썼다. 살아 있는 사람에게 줄 수 있는 최대한 찬사가 아닐까 싶다. 철학자 칸트 이야기로 기억되는데, 죽음을 앞에 두고 자기 인생을 돌이켜 보면서 ‘참 좋다.’고 말했다. 그게 무슨 뜻인지 아직 잘 알지는 못하지만 아마도 자신의 위대한 승리를 지적한 말이 아닐까 싶다.
「레 미제라블」 속엔 이 세상에서 있을 수 있는 모든 이야기가 들어 있다. 이 책은 프랑스 혁명 전후의 역사적 배경에서 그 격동기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많은 이야기를 조상(彫像)한다. 그 소설을 완전히 번역한다면 우리 책으로 40, 50권은 되지 않을까 싶다.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피투성이가 된 마리우스를 장 발장은 살려낸다. 그는 마리우스를 코제트와 결혼시켜 놓고 두 연인의 행복한 삶을 바라보면서 자신의 비밀을 끝까지 말하지 않고 죽는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의 죽음에 대한 묘사가 인상적이다. 장 발장은 코제트와 마리우스의 집 앞까지 갔다가 그냥 돌아온다.
기력이 쇠진해서는 중간쯤 갔다가 돌아온다. 더욱 쇠진해서는 조금만 가다 멀리 시선을 주면서 돌아온다. 움직일 수 없을 때가 되어서는 누워서 그들의 행복에 대해 생각한다. 그리고 홀로 죽는다. 낙엽처럼…. 그 뒤에 코제트와 마리우스는 모든 것을 알고 오열한다. 인생은 낙엽과 같은 것인가. 낙엽처럼 봄부터 한여름 나무를 살찌우고 찬바람 부는 가을 미련 없이 떨어져 어디론가 사라진다.
나에게 「레 미제라블」은 어학 공부를 하는 계기도 마련해 주었다. 그 당시 이 책을 계기로 많은 소설을 별 무리 없이 읽을 수 있었다. 문학‧미술‧철학‧역사‧종교 등 비교적 폭넓은 독서를 했다. 삼촌 방에 있는 책을 거의 다 읽었고 그 뒤에도 도서관에 다니며 읽었다. 6‧25 때는 책이 시장 바닥으로 쏟아져 나와 책을 저울로 달아 휴지 값에 사기도 했다.
그 당시 미술반에 다닐 때 1년 상급반에 서로 책을 나누어 보며 친하게 사귀던 친구가 있었는데 졸업 후 그 집에 가 보니 반 고흐의 전기 상권과 중권은 내게 있고 하권은 그 집에 있기도 했다. 요즘 세태와 비교해 보면 정말 꿈같은 시절이었다. 입시 지옥을 살아가는 요즘 청소년들이 딱하기만 하다.
어떤 사람은 유복한 집에서 태어나고 어떤 사람은 어려운 집에서 태어난다. 그것이 자연의 섭리인가. 며칠 전 텔레비전에서 「재일한국인(在日韓國人)」이란 책에 대해 저자와 독자의 대화 시간이 있었다. 그 자리에서 한국인을 차별하는 일본에 몸으로 저항한 김희로(金喜老) 사건 이야기가 나왔다. 재일동포 2세인 고(故) 권희로 씨는 의붓아버지의 구박으로 13살 때 가출하여 배가 고파 음식을 훔쳐먹었고, 일본 사회의 천대 속에서 수차례 감옥에 들락거리며 젊은 시절을 보냈다. 의붓아버지의 성을 따라 ‘김희로’라는 이름을 사용하던 1968년 2월20일 채권자의 청부를 받아 빚독촉을 하던 야쿠자 2명이 “조센진, 더러운 돼지새끼‘라고 한 말에 격분해 라이플총으로 이들을 사살했다. 그는 다이너마이트와 실탄을 갖고 다음날부터 나흘간 후지야마 여관의 손님 등 12명을 인질로 잡고 경찰과 대치하다 4일 만인 24일에 검거되었다. 이 인질극은 당시 언론매체를 통해 생생히 중계되었고 그는 ”경찰관의 한국인 차별을 고발하기 위해 사건을 일으켰다“고 주장하며 TV를 통해 경찰의 사과를 받아내 파문을 일으켰다. 체포된 후 8년간의 재판 끝에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쿠마모토 형무소에 수감되어 일본 최장기수로 31년간 복역하였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꼭 장 발장의 경우와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가슴이 뭉클하고 참으로 착잡한 생각이 들었다. 분노와 안쓰러움이 뒤범벅되는….
빅토르 위고가 「레 미제라블」을 쓴 때(1862년)와 지금은 백 년 이상의 차이가 있는데 아직도 이 세상에는 그와 같은 일이 너무도 많이 일어난다. 지금 원고지 앞에서 인생과 이 세상에 대해 생각한다. ‘주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상대적인 것을 극복하고 제 삶에 평화가 있기를….’
조각가 로댕은 빅토르 위고 기념상을 만들었다. 그 영웅적 기념상은 로댕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한 위대한 조각가의 손이 빅토르 위고를 영원한 영웅으로 형상화한 것이다. 위대한 예술가 빅토르 위고는 이 책을 통해 만인에게 감동을 심어주고 세상에 사랑과 평화의 향기를 안겨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