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간 날들을 돌이켜 보면 나는 어릴 때 이미 내가 살아갈 어떤 큰 길이 잡혀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물론 그때그때는 전혀 알 수 없는 일이었지만 어찌해서 내가 이런 삶을 엮어오게 되었는가 하는 것은 운명이랄까, 주어진 길을 어떤 힘에 이끌려 하루하루 살아온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무수한 갈림길을 만났다. 그때마다 순전한 내 이성의 힘만으로 선택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그래서 그런지 나는 지금도 내게 맡겨진 삶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 늘 생각한다. 또 그것을 오늘 내가 얼마만큼 잘 수행하는지에 대해 반성한다. 더 욕심내지 말고 오직 정성을 다해 내가 오늘을 어떻게 살아야 할까를 생각한다. 지금 내가 할 일이 무엇인가. 그것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나는 지금도 선택의 갈림길에 서 있다. 어릴 때는 모르고 살았고 철들면서부터는 많은 고통을 겪어야 했다. 지금은 별로 부담스럽지 않은데 내 심중 깊은 곳에서 들려오는 신호를 잘 해석하기만 하면 충분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며칠 전 나는 ‘소리를 듣는 사람’을 만들었다. 어제 그것을 석고로 떠놓고 아침에 궁금해서 작업실로 들어가 얼마나 만들어졌나 관찰했다. 손을 귀에 대고 까마득한 어디선가 들려오는 소리를 놓치지 않으려는 자세가 되도록 했다. 자기 내면의 소리를 듣고 있는 것이다. 70년대 초반에도 한 번 만든 적이 있었다.
이번에 두 번째로 소리를 듣는 사람을 만들게 된 셈인데 그때는 불혹의 나이 마흔이었으리라고 생각된다. 사는 것이 너무도 힘들었을 때다. 이상스런 이야기 같지만 정말 무슨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형태를 어떻게 가누어 나가야 할지 너무도 막막한 시절이었는데, 내면에서는 끊임없이 나를 감전시키는 어떤 힘이 작용하는 것이었다. 나는 속으로 노래를 부르면서 일했다. ‘내게 이 무슨 큰 복인가.’
나의 어머니는 그때 반신불수가 되어 있었다. 자식이 되어 효를 제대로 못하는 안타까움 속에서도 그 신호 소리는 나에게 충만한 탄력을 주었다.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 몇 년간의 글방 시대가 있었다. 학문이라는 것은 물론 몰랐을 터였고 붓글씨 쓰는 재미는 대단했다. 초등학교 시절에는 도화(圖畫)책을 받을 때가 좋았다. 크레용으로 혼자서 모사를 많이 했다. 4학년 때인가 소중한 선생님을 만났다. 워낙 작은 시골학교라 교장이 담임을 했는데 그분이 서도에 능한 분이어서 붓글씨 공부를 많이 시켰다. 나는 그때 전교생 중에서 특별히 인정을 받았다. 아무개 하면 모르는 학생이 없을 만큼 유명했다. 히라시마(平島)라는 교장이었는데 언젠가 그분의 아들을 함께 만나게 되리라는 생각을 늘 하고 있다.
해방이 되었다. 박봉규 선생을 만나 문장 지도를 받았고 강연환 선생을 만나 그림 지도를 받았다. 두 분이 나를 발탁했다. 히라시마 선생, 박봉규 선생, 강연환 선생. 그 세 분은 내 인생길 첫 발짝 지점에서 서예와 그림과 문장으로 내 심성을 잡아준 참으로 고마운 분들이었다. 지금도 가끔가끔 생각이 나는데 만날 분들을 다 만난 것이 아닌가…하고 생각한다.
중학교에 입학했다. 여름방학 숙제를 제출했는데 다음 날 학교에 가 보니 내가 쓴 붓글씨가 교실 뒷벽에 걸려 있었다. 2학년이 되었을 때 서양화 하시는 이동훈 선생이 우리 학교에 부임했다. 신록의 여름 운동장 가에서 야외사생을 했는데 다음 날 학교에 가 보니 내 그림이 교실 뒷벽에 걸려 있는 것이다. 3학년 때는 충청남북도 한색미전에서 2등상을 받았다. 시인 한성기 선생을 만났고 작곡가 구두회 선생을 만났지만 이미 내 마음은 미술 쪽으로 흘러가고 있었던 것 같다. 초등학교 시절에 경험한 것들을 중학교 시절에 또 한 번 경험한 셈이었는데 선택의 여지가 생길 틈도 없이 내가 갈 길이 잡혀버리고 말았다.
나는 어떤 전공의 길을 가야 할 것인가에 대해 고민해 본 적이 없다. 그런 것을 고민하기에는 아직 이른 나이었고, 이른 나이대에 내게 필요한 것을 다 경험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은 내가 어떤 일을 할 것인가를 의도하기 이전에 된 일이다. 예측하기 이전에 또 예고도 없이 된 일이다. 나는 지금도 그것이 무슨 이치인가 하고 늘 이상하게 생각한다. 그런 일이 생기리라고는 짐작도 하지 않았고 기대 같은 것은 더더군다나 있을 리 없었다. 내가 결정한 것이 아니고 그렇게 결정된 것이다.
나에게 고난의 시대가 찾아왔다. 청운의 꿈을 품고 대학에 진학하려 했다. 그러나 아버지의 반대에 부닥쳤다. 법과대학이면 모를까 미술대학은 안 된다는 것이다. 나는 몇 날 며칠 고민을 하다 일단 포기했다. 중학교 시절에도 반대에 부딪힌 적은 있었지만 별로 타격을 받지는 않았는데 참으로 큰 충격을 받았다.
가정이 어렵기는 했어도 나는 좌절이라는 것을 이때 처음 경험했다. 나는 너무나 막막했다.
초등학교 교사로 취직해야 하겠다고 마음먹었다. 나는 사범학교를 다녔기에 취직하는 것은 염려하지 않았다. 졸업성적 우등생이면 자기가 바라는 지역에 발령을 내도록 하는 제도가 있었다. 도청에 찾아갔다. 마침 도 장학실에 은사 한 분이 계셔서 시내에 발령을 받고 싶다는 의사를 표시했다.
그러자 시골로 가면 어떻겠나 하는 것이었다. 나는 싫다고 했다. 자존심 때문이 아니었던가 싶다. 좀 있다가 보자 하여 두 주일쯤 후에 다시 찾아갔다. 그렇게 하기를 서너 차례. 그제야 세상을 좀 알게 되었는데 대단히 화가 났다. 초등학교 선생은 하지 않으리라.
마침 중등교사 시험이 있었다. 나는 미술 분야로 응시했다. 많은 미술서적을 읽고 있었기 때문인지 1차로 합격했다. 전쟁 중이었는데 부산에 가서 실제 수업을 하는 시험을 치렀는데 낙방을 했다. 너무 어려서 그랬겠지 생각하고 다음 해에 또 응시하면 되니까… 했다.
나는 시내 어떤 초등학교에 임시교사로 들어갔다. 다른 사람들은 발령을 잘도 받는데 나만은 안 되는 것이었다. 거기서도 몇 달 머물지 못하게 되었다. 세상이 한심한 생각이 들었다. 이럴 수가 있는가. 나는 학생 시절에 문학‧미술‧철학 등 상당한 양의 책을 읽었다. 내 머릿속은 그런 이야기들로 가득 차 있었는데 세상은 그 이야기와는 너무나도 천양지판이었다. 안 되겠다, 다시 대학에 가야만 하겠다, 그러고 있는데 모교에서 이동훈 선생이 오라는 것이었다. 사범부속 초등학교로 발령을 내놓고 모교에서 근무를 시작했다. 굴욕의 늪에서 벗어나는 듯싶었다. 명예회복 같은 감정을 느꼈던 것 같다.
그럭저럭 세월은 흘렀다. 사범학교를 졸업한 지 2년 후 나는 참지 못하고 다시 미술대학 문을 두드렸다. 그동안 받은 월급을 모았는데 등록금과 한 학기 생활비쯤 되었던 것 같다. 새로운 친구들을 만나고 스승들을 만났다. 2년간의 어두운 늪을 빠져나와 밝고 희망찬 생활이 다시 시작되었다. 그때 만일 명예롭게 나에게 발령장을 주었더라면…. 어쩌면 거기서 안주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