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여태까지 모든 것을 내가 판단하고 내가 선택했다기보다 수동적으로 그렇게 조건 지어졌다고 하는 편이 더 옳을 성싶다. 생활을 엮어 나가는 면에 있어서는 냉혹하게 판단하고 가차 없이 선택했지만 예술의 길을 개척해 나가는 면에 있어서는 그렇지만은 않았다고 생각된다. 나도 알 수 없는 어떤 에너지가 어른거려 그리로 끌려갔다는 표현이 더 정확한 것 같다.
내가 왜 서도의 길을 내던지고 그림의 길을 갔는가 하는 것도 그렇고 그림의 길을 내던지고 조각의 길로 갔는가 하는 것도 그렇다. 그때그때 새로운 스승이 나타나 나를 잡아준 때문이 아니었을까. 내가 스승을 찾아간 것이라기보다 내가 가는 길가에 새로운 스승이 있어 나를 인도한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물론 나는 지금 조각가로서 일하지만 그림도 70년대부터 계속하고 있고 또 근간에는 붓과 먹을 차츰 쓰고 있다. 나는 걸어오는 동안 내가 만난 모든 것을 하나도 버리지 않았다. 어릴 때 좋았던 음악은 지금도 라디오를 통해 하루 종일 듣고 있고 글도 맘대로 쓰라는 주문이면 여간해서 거절을 못한다. 나에게 왔던 것 가운데 내가 버리지 못하는 것들은 모두 좋은 것들이다. 저 하늘과 구름까지도, 꽃과 풀과 나무까지도, 나이 들수록 저들이 왜 이다지도 찬란하게 보이는지. 나는 그런 속에서 살고 있고 그들은 나의 가족이 되었다.
내가 조각의 길을 탐색해 가는 과정에서 수수께끼 같은, 지금도 명확히 설명할 수 없는 문제가 하나 있는데 어찌해서 추상의 길을 가지 않았나 하는 점이다. 내 젊은 시절은 시대 분위기가 그랬고 거의 모든 친구가 그쪽 세계를 찾아갔는데 왜 나만 인체를 잡고 떠나지 않았을까. 거기에 대해 자신 있는 해답을 내릴 수 없다는 것이 솔직한 나의 고백이다.
나의 스승 김종영 선생은 내가 학교를 졸업한 뒤부터 본격적으로 추상 형태의 길로 들어섰다. 나는 그 길을 따르지 않았다. 나는 그분한테서 모든 것을 다 의심 없이 받아들였지만 형태에 대한 한 내 길을 찾으려 했다. 서구 현대미술사에서 내가 그것을 못 보았을 리는 없다. 한편에 모딜리아니‧루오‧자코메티‧자드킨이 있고, 또 현실을 살아가는 아픔과 거기에 실존주의 철학과 동양철학이 있었다. 옆에는 장욱진과 박수근이 있었다.
두 차례의 흔들림이 있었는데 한 번은 60년대 전반 어느 때인가 아르프처럼 유동하는 추상 포럼을 딱 한 번 만들었고, 60년대 후반에 미니멀 쪽으로 흠뻑 빠졌던 시간이 있었다. 그때 나는 단호히 ‘아니다.’하고 결단을 내렸는데, 그 심정을 분석해서 기록한다는 것은 아직은 무리일 것 같다. 부정확한 논리를 제시하는 것보다 묻어두는 편이 순리가 아닐까 싶다.
그 뒤로도 한동안 번민을 했다. 그러겠노라며 나는 추상 또 비구상 형태의 사상과 방법을 내 인체의 형상 속에 수용하게 되었다. 그것이 잘한 일인지 잘못한 일인지의 성급한 판단은 유보하는 것이 옳을 성싶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내 자유를 찾고 싶었다는 사실이다. 예속이나 편승에서는 자유로울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인데 그것이 내 조건이 아닐까 싶다. 못났어도 나는 내 조건을 살고 싶었다.
예술가의 길은 참삶을 찾는 것이고 그럴진대 형태의 찾음새는 나의 진실이 우선하는 것이 아닐까. 나는 내 진실을 찾아, 틀렸다 해도 할 수 없는, 외진 길일지라도 어쩔 수 없는 내 길을 가고 싶다. 좌우간 나는 지금 후회가 없다. 나는 지금 즐겁게 일하고 있으니. 그리고 세월이 모든 것을 평가할 테니.
모차르트가 아버지한테 보낸 편지에는 ‘아버지, 저는 지금 제 심정을 글로 다 표현할 수 없습니다. 저는 문필가가 아니기에…. 소리로라면 무엇이든 다 표현할 수 있습니다.’라는 이야기가 쓰여 있다.
나는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참으로 통쾌했다. 화가는 그림으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지 글로는 다 표현할 수 없다. 일본 화가 우메하라(梅原)는 부인이 죽었을 때 화실에서 나오지 않고 그림만 그리고 있었다 한다. 그림으로 그 무엇인가 긴 이야기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부질없는 세상사에 우왕좌왕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다른 무엇으로도 말할 수 없는 그것을 화가는 다만 그림으로 말한다.
내 형태에 있어서 그 내용이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되기까지는 그럴 만한 사연이 있었다. 내용은 형식을 수반하는데 내 형식이 추상형상으로 가지 않는 것이 그것과 결정적으로 상관이 있다고 보아야 할 것 같다. 어떤 형식에 어떤 내용을 담을 수 있는 것인지 모르지만 내 형식은 내용에서 나왔다. 미리 말해 두거니와 나는 그것을 분명히 설명할 수 없다는 점을 전제로 해야겠다.
언젠가 나는 반서구(反西歐)의 길을 생각한 적이 있다. 나의 길은 동양 주축의 길이고 한국 주축의 길이었다. 나는 이 세계 속에 살고 있는 동양 사람이고 한국 사람이다! 못났어도 내 노래를 부르고 싶었다. 내 노래를 부르기 위해서는 서양 형식이 부자유스럽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나하고 친근한 한국 형식, 동양 형식, 서아시아 형식에 대해 생각했다. 1965년 무렵 나는 내가 교육받은 서구라는 배경으로부터 이탈하기 시작했다. 말하자면 동쪽으로의 길을 선택했다. 나는 혼자서 동쪽으로의 대모험을 해왔던 것이다.
1970년 나는 ‘회향(回鄕)’이라는 작품으로 국전에서 추천작가상을 받았다. 고향 ‘향(鄕)’자에 돌아올 ‘회(回)’를 쓰지 않고 품을 ‘회(懷)’자를 썼는데 그것이 그때 내 정신을 표현하는 데 적합하다는 생각에서였다. 그 ‘회’라는 글자는 내 고향 회덕(懷德)이라는 지명에서 딴 것이다. 나는 현실 문제를 제외할 수 없었고 내 현실의 뿌리(역사)를 제외할 수 없었다.
‘내 나무는 내가 태어난 이 땅에 심고 이 땅에서 세계를 호흡해야 옳겠다. 일단 고향을 찾아 놓고 보자.’
내가 지금 얼마만큼 고향을 찾았는지는 모르지만 많이 생각했던 것만은 사실이다. 나는 외로운 몇십 년을 살아야 했다. 그 역행의 동진(東進) 생활은 쉬운 것이 아니었지만 재미도 많았다. 뒤꼍 울타리 밑에 말없이 피어 있는 봉선화처럼 긴 시간을 혼자서 살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으로 즐거운 시간이었다. 나는 지금도 이 이야기를 되도록 피하려 한다. 이 반서구 이야기는 이쯤에서 끊어두자. 나의 삶 전체에 대한 종합적 문제이기에 한두 마디로 설명하기는 무리다. 어찌 됐건 내 잀애에 가장 결정적인 결단이었던 것만큼은 분명하다고 생각한다.
뜻을 세우고 찾아가는 과정이란 산 첩첩 물 첩첩이었다. 한 고개를 올라서면 저쪽에 또 한 고개가 있고, 물을 건너면 그 저편에 더 큰 강이 있었다. 끝이 없었다. 이제는 끝이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 일하는 게 즐겁게 되었다. 할 일이 눈앞에 너무도 많이 전개된다. 언제 저걸 다 소화하랴. 이다음에는 어떤 세계가 다가올까 궁금하지만 지금 이 일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한다.
나는 예술을 진리의 탐구라고 생각한다. 진리가 하나이기를 바란다. 세상 모든 것은 하나의 진리에 포함되리라 생각한다. 무엇이든 탐구의 꼭짓점은 하나일 것이다. 나는 그 하나의 꼭짓점을 향해 걸어온 것 같고 끝을 만날 성싶지 않은 그 꼭짓점을 향해 지금도 가고 있는 것 같다. 그것이 안 보인다. 그것이 내 눈에 보이길 희망한다. 무슨 고개를 넘어야 그곳에 이를 수 있는가. 일하고 생각하면서 기다리는 것.
내가 살아온 한 줄기의 길이 보인다. 그 길을 구부러뜨림 없이 밀고 나갈 것이다. 내일은 알 수 없는 것이지만 이제까지 해온 것처럼 그렇게 살아갈 것이다. 주어진 내 길을 찾아. 나는 마음의 움직임을 믿는다. 신호는 마음이라는 통로를 통해 들어온다고 믿는다. 나는 내 마음의 문이 늘 자연스럽게 열려 있기를 바란다. 마음을 두드리는 그 소리를 용감하게 잡고 싶다.
